[글과 세상] "역사의 망령 업은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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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현실 참여의 실천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우리는 오욕의 역사를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다. 아울러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를 물려줄 수 없다. 용서와 화해보다 더 소중한 미덕은 역사에 있어서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우리는 묻고 싶다.

누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용서할 권한을 현정권에 부여했단 말인가? 역사에의 망각을 화해로, 구악(舊惡) 과의 공존을 용서로 호도시키는 그 모든 정치적 술수를 우리는 단호히 반대한다. "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가 이같은 성명서를 내고 지난달 30일부터 4일까지 서울 시청 앞에서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벌였다.

문인들의 이번 시위는 1997년 1월 김영삼 정권 시절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가두 시위를 벌인 후 처음이다.

이를 계기로 작가회의는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문제에 대한 문인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진보적 문화예술단체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로 했다.

작가회의는 74년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에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그리고 참다운 민족문학의 실현을 위해 창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확대.개편된 문인단체로 1천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창립 이래 단독으로, 혹은 다른 사회단체들과 연계한 민주화 시위 및 집필 활동으로 고은.백낙청.송기숙.황석영.송기원.박노해씨 등 수십명의 회원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70, 80년대 글과 몸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하루도 최루가스 냄새가 가신 적이 없던 작가회의가 다시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번 1인 시위에는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씨, 여성문인을 대표한 소설가 이경자씨, 유신독재 시절 학생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소설가 김영현씨,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민청학련과 '오적' 필화사건 등으로 사형까지 구형받았던 민주화운동의 상징 김지하 시인도 합류했다.

"우리는 지금 죽은 자의 관 위에 다시 매질을 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망령을 업고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참혹했던 지난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려는 그 모든 세력들에게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민족 정기의 이름으로 사회에 '분명한 경각심' 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문사(文士) ' 들이 결코 게을리할 수 없는 사회참여다.

문민정부.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재야 세력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편입되며 기득권세력화 돼가고 있다. 해서 현실 사회의 혼탁을 거르고 막을 수 있는 청정한 재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가 짝짜꿍으로 서로의 이익을 지키려는 하 수상한 시절, 작가회의가 경각심을 심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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