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수취인 불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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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은 사실 편안한 볼거리를찾는 관객들에겐 불편한 영화다.

낚시 바늘로 자해하는 장면때문에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실신 소동을 일으켰던〈섬〉은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큰 박수를 받았지만, 정작 국내에선 그의 마니아들만이 객석을 지켰다.

신작〈수취인불명〉도 '충격'과 '파격'으로 따진다면 전작들에 버금간다.

젖가슴을 칼로 도려낸다거나 논두렁에 머리가 쳐 박혀 죽고, 제 눈을 칼로 찌르고... 그러나 이 작품은〈악어〉〈야생동물보호구역〉등 '김기덕표' 영화의 인물들이 왜 하나같이 자해 등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분노와 슬픔을 삭이는 비뚤어진 인간이었는지를 설명해준다.

감독은 70년대 미군 기지 주변에 살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 지금껏 등장인물들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실존 인물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당시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져있는 '수취인불명(unknown Address)'이라 찍힌 편지처럼 시대 자체로부터 수신되지 않은 사람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혼혈아 창국(양동근)은 개장수의 일을 도우며 마을 한 기슭의 빨간 버스 안에서 양공주였던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창국모(母)(방은진)는 언젠가 미국에 있는 남편이 자신들을 데리러 올 거라 믿으며, 편지를 쓰지만 편지는 늘 '수취인불명'이란 빨간 도장이 찍힌 채 되돌아온다.

어릴 적 오빠가 쏜 장난감총에 맞아 한쪽 눈을 잃어버린 은옥(반민정)은 미군병원에서 눈을 치료받겠다는 희망을 품고 영어 공부에 열중한다.

마을에는 은옥을 좋아하는 수줍음많은 소년 지흠(김영민)과 6.25 훈장에 유달리집착하는 지흠부(父), 그리고 창국을 괴롭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장수 '개눈(조재현)'등이 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한 미군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나온다. '세계 평화를 위해' 적도 없는 이국 땅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

그러나 영어라면 끔벅 죽는 마을 사람들과 극 중간 중간에 하늘을 가르는 미군기, '미군을 건드렸다'며 길길이 뛰는 한국 경찰관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은근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은 결말은 하나같이 불행하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던 창국은 자신을 괴롭히던 '개눈'을 처절하게 응징하고, 미군 문신이 새겨진 어머니 젖가슴을 도려낸 뒤 자살해 버린다. 그의 어머니 역시 슬픔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른다.

은옥은 미군 병사를 만나 눈을 치료하지만 두 눈으로 본 세상 역시 다를게 없자 눈을 칼로 찌르고, 지흠은 은옥을 괴롭히는 미군에게 화살을 쐈다 쇠고랑을 찬다.

유난히 '눈'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한쪽 눈을 머리카락으로가린 은옥과 눈 한쪽씩을 다친 창국과 지흠, 이렇게 셋이서 나란히 논길을 걷는 장면은 왜곡된 세상에 대한 소외 계층들의 항의가 아닐까.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신인들과 조재현, 명계남, 방은진 등 중견들의 연기 호흡이 인상적이다. 5월 26일 개봉.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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