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명동학교서 축구 첫 시작… 중국인들 “옌볜은 축구의 고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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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14면

옌볜 조선족이 축구와 애환을 함께해 왔던 역사는 꽤 오래다. 배고픔과 일제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은 한반도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1906년 용정에 사립학교 형태인 서전서숙이 생긴 뒤 창동과 광성, 명성, 정동 등에 잇따라 학교가 세워졌다.

정식 기록에 따르면 옌볜 조선인의 축구는 1908년 허룽의 명동학교에서 시작했다. 김약연 교장의 지도 아래 학생과 교원 모두 참여하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초기 옌볜의 축구 토대는 ‘러시아풍’이었다. 같은 해 옌지에 세운 창동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갓 부임한 박문호 교원이 주도했으며, 이어 그와 쌍벽을 이룬 허룽의 장동학교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주한 교직원이 이끌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에 만주국을 세우면서 조선인의 축구 또한 그 통제 아래에 놓였다. 만주국이 주최한 전체 도시 대항 축구대회는 10여 차례 열렸는데,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성 팀’이 아홉 차례나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한반도 사람들은 축구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해방 뒤 혼란기를 거쳐 사회주의 중국이 세워진 이래 조선족의 축구 실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1951년 중국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선발한 중국 축구 국가대표에 리봉춘 등 4명이 들어갈 정도였다. 1953년 상하이에서 벌어진 전국 청년축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선발된 국가대표 중 조선족은 6명이었다.

옌볜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의 수준과 맞먹었다. 1950~60년대 옌볜 출신 축구 선수는 전국 각 팀에 모두 640여 명이 ‘수출’될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 중국인에게 옌볜은 ‘축구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기질이 강해 끝까지 분투하는 선수들에게는 ‘동북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94년 중국 축구 프로리그가 출범한 이후 초반에 상위리그에 머물렀던 옌볜팀은 2000년대 들어 재정지원의 감소와 축구 인구 저변의 축소 등으로 인해 기세가 움츠러들었고, 현재는 2부 리그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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