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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경축사에 담아야 할 세 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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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영욱
논설위원

대통령께. 8·15 경축사의 상당 부분을 경제문제에 할애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우리 경제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한 해 동안 무려 세 번이나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정도니까요. 정부 예측 능력도 문제지만 경제가 심상찮다는 방증입니다. 여북하면 내수 활성화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장관들을 직접 닦달하겠습니까. 효과도 없고, 근본대책도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경축사에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경제살리기니 활성화니 하는 말도 가급적 빼야 합니다. 조바심 내거나 과욕을 부려선 안 됩니다. 기업에 투자와 일자리를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경제만 왜곡시키고 후유증만 쌓입니다. 이번 경기침체는 상당히 오래 갈 겁니다.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세계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 경제를 호황으로 되돌릴 순 없습니다.

 향후 지속될 저성장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해야 할 일도 이겁니다. 경제가 당분간 많이 어려울 테니 다 같이 인내하자고 호소하십시오. 국민에게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경제전문가로 전락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지금의 경제장관들처럼 해선 안 됩니다. 대통령께서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우선 과감한 구조조정입니다. 벌써부터 가계부채가 심각하다며 만기연장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저기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됩니다. 모두를 살리겠다는 생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살릴 것과 내칠 것을 엄정하게 구분하십시오. 그런 후 살릴 건 확실히 살리고 내칠 건 과감하게 내쳐야 합니다. 가계부채 모두를 만기연장해선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업 부채도 마찬가지입니다. 외환위기 당시를 교훈으로 삼으십시오. 기아자동차 등 부실기업을 제대로 정리했다면 위기를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절대로 부도내지 말라”고 엄명했고 이 바람에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번 경기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경기부양을 한 건 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구조조정을 해야 했습니다. 부실기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가계부채도 손보고 저축은행 부실도 제때 처리했다면 지금 위기의 강도는 한결 덜할 겁니다. 그때 구조조정 못한 후유증이 지금 되살아나고 있기에 충격이 더 큰 겁니다.

 경제는 정말 공짜가 없습니다. 김대중 정부도 그랬습니다. 어쭙잖게 경기부양책을 쓰는 바람에 노무현 정부가 카드 대란으로 큰 홍역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선거 국면인지라 참으로 어렵겠지만 그래도 구조조정을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건 나라의 미래, 가까이는 다음 정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균형예산의 도그마에서도 속히 벗어나십시오. 경기부양을 하면 안 된다고 해놓고 무슨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칼럼에서 균형 도그마에서 벗어나자고 했더니 추경예산을 편성하자는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성장이 오래 지속되면 사회문제는 반드시 터집니다. 벌써 의료보험료 연체가 늘고 있다지 않습니까. 또 구조조정을 하면 실업이 늘고, 금융사 부실도 급증합니다. 이런 부분을 재정이 책임져야 합니다. 의료보험료나 실업연금, 공적자금 등의 얘기입니다. 하지만 균형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런 재정정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데 필요하다면 추경도 해야 합니다. 4대강이나 신공항 등 어거지 경기부양을 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중장기적인 재정정책도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일입니다. 핵심은 사람을 키우는 겁니다. 선진국에 비해 태부족한 학교 시설을 고치고, 보건소를 새로 짓고, 간호사 등을 양성하는 일입니다. 지금 해야 몇 년 뒤 성과를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재정 적자가 나쁜 게 아니라 재정 낭비가 나쁘다는 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주는 교훈입니다. 경제에는 임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선 안 됩니다. 꼭 필요한 걸 해야 합니다. 경축사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