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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맛] 앵커 백지연의 '와인이 있는 이탈리안 푸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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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삶은 달걀 노른자를 먹는 것과 비슷하리라 짐작했다.

영양소를 알차게 품고 있지만, 뻑뻑하고 건조해 목구멍으로 쉽게 넘기기 힘든 노란 덩어리. 앵커 백지연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완숙 달걀 노른자를 닮았다.

커피 잔 너머로 빈틈없음, 교과서, 꼿꼿함 같은 단어들이 몇 차례 오갔을 무렵 YTN 뉴스 생방송을 마치고 온 그가 레스토랑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앵커 초창기 시절부터 즐겨 찾던 곳이에요. 주방장은 몇 번 바뀐 걸로 알고 있는데 음식 맛은 처음 그대로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가족 행사나 손님 접대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가 됐죠."

분수대 물소리가 시원한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잔을 채워주는 웨이터에게 친숙한 눈인사를 건넨다. 16년 단골답게 그가 주문한 메뉴는 '늘 먹던 대로'.

에피타이저로 이탈리아식 육회인 쇠고기 카파치오가 나왔다. 얇게 저민 선홍색 안심과 푸릇푸릇한 루콜라 위로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그의 손동작에 눈이 간다.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고 깔끔하다. 1988년 처음 메인 뉴스 앵커를 맡았을 때, '정말 입사 5개월차 햇병아리 아나운서가 맞느냐'는 감탄 어린 질문을 듣곤 했다. 우리나라 여성 앵커의 대명사로 꼽혀온 지 17년, TV화면 속 그는 여전히 흔들림없이 안정된 모습이다. 비결은 단순하다. 기본에 충실할 것, 노력을 쉬지 말 것.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료지요. 나쁜 재료에 아무리 장식을 하고 소스를 쳐도 입 안에 들어가면 대번 들통이 나요. 방송도 마찬가지예요. 생방송 5시간 전 출근해 멘트를 고민하고 그날의 뉴스를 모두 체크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좋은 재료를 위한 당연한 과정이죠."

와인을 한 잔 곁들이자며 이탈리아산 '키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를 주문한다. 이곳 지배인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무겁지 않고 산뜻해 입에 맞았단다. 다른 술은 잘 마시지 않지만 와인은 한두 잔 저녁 식사와 함께한다.

해산물을 푸짐하게 올린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포크로 흩뜨리자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오른다. 주황빛 소스의 새콤한 맛과 탱탱한 오징어 살, 탄력 있는 면발이 입 안을 뿌듯하게 채운다. 그는 요리를 즐긴다. 제법이라는 칭찬도 많이 듣는단다. 부엌에 선 백지연이라. 고개를 갸웃하자 "파스타는 삶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며 본격적으로 요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1분이라도 더 삶으면 퍽퍽한 녹말 맛이 나고 덜 삶으면 질감이 살아나지 않는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요령에서 훌륭한 스파게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요리에 재미를 들인 것은 199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받을 때. 크리스마스 이브, 각국에서 모인 기자들이 전통 요리를 선보이는 조촐한 파티를 열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팩스로 '잡채 레시피'를 전송받았다. 서울에서 소포로 부쳐온 당면으로 어머니 손맛을 떠올리며 비스름하게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 영국을 떠날 때 즈음에는 김치도 담그고 웬만한 요리는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따로 배우거나 요리책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한번 먹어보면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단다. 미각의 기억대로 따라 해 보면 크게 어려운 요리가 아니면 제대로 맛이 나온다. 언제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 없더라도 그가 만드는 음식은 그러하리라 수긍이 간다.

접시를 치우러 온 웨이터가 스파게티를 남겼다며 섭섭해하자, 곧 나올 양갈비 구이는 깨끗이 비우겠다고 웃어보인다. 이곳 메뉴 중 가장 좋아하는 요리다. 양고기는 미디엄 레어나 레어 상태로 익혀야 맛있다. 너무 익히면 질감이 떨어지고 양고기 누린내가 난다. 큼직하게 썰어 한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깔끔하게 씹히는 맛이 스파게티를 섭섭하게 할 만하다. 생후 2년 미만의 어린 양고기만 골라 허브로 냄새를 없앤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가 말을 꺼낸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때문에 많이 변했다.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라고 말을 고치는 얼굴에 미소가 돈다. 하루 8잔씩 마시던 커피를 한두 잔으로 줄였다. 아이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몸을 돌본단다. 완벽주의란 말을 듣는 성격에도 여유가 생기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한다.

디저트 그릇이 치워졌다. 훌륭한 저녁식사에 대한 감탄을 주고 받은 뒤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상한 이야기지만"하고 그가 단서를 달았다. "결혼은 안 해봐도 되지만 아이는 꼭 가져보는 것이 좋아요. 말도 안 되지만 솔직한 생각 그대로예요."

어느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달걀 완숙보다는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 생각이 났다.

글=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백지연과 함께 간 '일폰테'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는 국내 호텔업계 최초로 1983년 문을 열었다. 초창기부터 현지에서 주방장을 초빙, 정통 이탈리아 요리의 풍미를 그대로 살려낸다는 평가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서울 힐튼호텔 지하1층 (02- 317-3270), 점심 11:30 ~ 14:30 / 저녁 18:00 ~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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