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사 경영 잘했더니 아태지역까지 맡으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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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후지쯔 안경수 사장(49)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을 때, 안사장은 출장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는 대로 곧 인천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지난 해만 해도 한 해의 삼분의 일 정도를 해외출장으로 보냈다. 국내에 있는 나머지 시간도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한국후지쯔 대표로서 뿐만 아니라 후지쯔 본사 임원으로도 활동을 하게 됐거든요. 앞으로는 일본으로 출퇴근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안사장은 4월 초부터 후지쯔 본사 글로벌 영업부문의 아시아태평양 영업본부 부본부장(상무이사)으로 발탁됐다. 이번 임명으로 안사장은 한국후지쯔 사장과 후지쯔 타이완 회장을 겸임하게 됐으며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비즈니스를 총괄하게 된 것이다.

본사 임원이라는 위치는 큰 의미를 지닌다. 회장이 주재하는 본사 중역회의에 참석하는 일원이기 때문이다.

후지쯔는 전세계적으로 18만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다. 그 중에서 회장과 함께 경영에 대해서 회의를 하는 중역은 50명을 넘지 않는다. 더구나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그런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후지쯔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기업 내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30대에 삼성·대우그룹 임원 발탁

안사장의 삶 자체가 이례적이다. 84년 33세의 나이에 대우전자 이사 자리에 올랐다.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리에서 과장 정도가 보통인 나이다. 지금처럼 직급 파괴가 일반적이지도 않은 때였다.

친인척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 대기업 이사 자리에 오른 사람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없었다.

“글쎄요. 당시 대우전자 사장이나 김우중 회장만 알고 계시겠죠. 저로서도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임원 자리에 않힐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확신이 생기지 않거든요. 아마 잠재력을 생각하셨겠죠. 또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이라 젊은 사람에게 맡겨보자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당시에 신문에도 나고 그랬습니다.”

안사장은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유학했다. 이곳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따고 전공을 바꾸어 재료공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땄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치는데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스탠포드대학은 지금도 실리콘밸리에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젖줄이다. 그런 분위기가 그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한창 실리콘밸리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앞으로 나도 저런 쪽에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지금까지 공부해온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더니 그게 바로 반도체였어요. 그래서 전공을 바꿨죠.”

졸업 후 실리콘밸리의 베리안(Varian)연구소와 스탠포드대 객원연구원을 거쳐 83년 처음으로 대우전자 해외 프로젝트 담당 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 후 5개월만에 이사 자리에 오른 것이다.

대우전자를 그만둔 뒤 다우기술 공동대표 이사 사장을 거쳐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에서 기획담당 이사와 경영관리팀 상무를 거쳤을 때 그의 나이 서른 여덟에 불과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다른 회사에서 옮겨와 그룹 회장 비서실 팀장을 맡은 것도 흔치 않은 케이스였다.

그 후 삼호물산 사장과 효성그룹 종합기획조정실 부사장을 거쳐 96년부터 한국후지쯔 사장을 맡고 있다.

인생으로써 이 정도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 안사장에게도 인생의 굴곡이 있었을까 궁굼했다.

“육체적, 정신적 연령과 사회적 연령이 불일치 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항상 10년 이상씩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온 셈이죠. 이사는 나이가 어려도 부장이나 일반 직원들은 어느 회사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업종면에서도 늘 새롭게 시작하는 분야에서 일해왔습니다. 예전부터 있었던 산업분야였다면 좀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엘리트 코스 걸어왔지만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30대에 이미 직장생활의 꽃이라는 이사에 올랐고 주요 대기업을 거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지금까지도 계속 인정받고 있는 것은 그가 옮기는 곳마다 보여주었던 탁월한 능력 덕분이다.

“대우전자에 처음 갔을 때 컴퓨터 사업부라고 해야 3명이 고작이었습니다. 컴퓨터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때였으니까요. 국내 영업, 해외영업, 개발, 생산, 구매까지 모두 전담해야 할 때였죠. 그렇게 시작한 회사가 87년 그만둘 때 매출액이 1천억원을 넘었습니다.”

또 85년에는 IBM으로부터 2백만 대의 컴퓨터 모니터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그 때까지 대우전자에서 컴퓨터 사업부가 생긴 이후 해외에 수출한 모니터 숫자가 총 1만대 에 불과했을 때다.

삼성 비서실에 있으면서 그룹의 정보산업 마스터 플랜을 짜는 일을 주도했었고 삼성SDS 초창기 기획단계의 책임자 역할을 했다. 90년 비서실에서 PC사업본부장으로 배치됐을 때 시장 점유율 4위였던 삼성전자의 컴퓨터 부문 매출도 그가 회사를 떠나던 93년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한국후지쯔를 맡고나서도 안사장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취임 후 3년 동안 약 세 배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동종업계와 비교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성장이었다.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시장 환경변화에 입각한 제품 포트폴리오 전략이 있었다.

메인프레임급 대형 컴퓨터 중심의 제품 라인을 소형제품 체계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PC서버, 노트북, 프린터 HDD 등 스타 제품을 계속 만들어낼 계획이다. 이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2년 후 지금 매출액의 약 10배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해 매출액이 얼마니까 올해는 여기서 몇% 성장한 얼마를 매출 목표로 잡자. 이런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직원들에게 얘기했습니다. 후지쯔가 어떤 회사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죠. 후지쯔는 반도체, 정보통신 분야만으로 연간 60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입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에서 2위권입니다. 모회사가 이렇게 크고 국내 시장의 잠재력이 큰데 사실 국내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소극적으로 사업을 해왔습니다. 직원들에게 눈을 크게 뜨고 보자고 얘기했죠.”

그러면서도 그는 “내 역할은 그저 사업을 펼쳐준 것뿐이고, 클 수 있는 회사가 큰 것뿐”이라는 말로 겸손해 했다.

최근 한국후지쯔의 달라진 모습은 ‘소프트 오픈’ 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 한국후지쯔는 그동안 메인 프레임급 중대형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하드웨어 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회사 이미지도 딱딱했다. 이를 부드럽게 바꾸어보자는 뜻이다. 또한 중대형 컴퓨터는 독자적인 운영체제에서만 작동하는 폐쇄적인 시스템이다. 소형 제품 체제로 제품군을 확대하며 오픈화된 시스템으로 나가자는 전략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고객을 대하는 태도나 직원들의 마인드도 ‘오픈’시키고 ‘소프트’하게 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요즘 경기침체와 벤처기업의 몰락으로 IT업계 전체가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후지쯔는 이런 침체된 시장환경에도 별로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 벤처 붐에 편승해 그 분야로 사업을 집중시킨 다른 기업들과 달리 기본적인 인터넷 인프라 구축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정재학 기자(zeffy@joongang.co.kr) / 사진 백지연 기자

자료제공 : i-Weekly(http://www.i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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