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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넥슨, 천하를 발 아래 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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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캐릭터

1994년 말, 26세 KAIST 박사과정생 김정주가 넥슨을 세웠다. 97년에는 30세 현대전자 직원 김택진이 엔씨소프트를, 같은 해 26세의 카이스트 대학원생 나성균이 네오위즈를 창업했다. 이후 한국 게임계의 성장은 곧 이들이 벌이는 ‘삼국지’였다.

 넥슨은 초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는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같은 게임으로 곳간을 채운 뒤 ‘던젼앤파이터’의 네오플, ‘서든어택’의 게임하이 같은 중소 개발사를 발 빠르게 인수했다. 현재 시가총액 9조원을 넘겨 중국 텐센트, 일본 닌텐도, 미국의 블리자드에 이어 세계 4위다. 창업주인 김정주 회장은 큰 경영 그림을 그리면서도 연극·스키·골프를 즐긴다는 점에서 지략가이자 예술가였던 조조와 닮았다.

 엔씨는 김택진 대표가 창업 초기 ‘게임계의 제갈량과 방통’으로 꼽히는 송재경(현 XL게임즈 대표)과 이희상(엔씨소프트 부사장)을 얻어 ‘리니지’ ‘아이온’ 같은 초대형 히트작을 내놓았다. 회사 시가총액이 4조원을 넘어가도 ‘영원한 현역’으로 밤새워 개발에 몰두하는 김 대표는 개발자들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다. 인덕으로 인재를 모은 촉나라의 유비같이 내로라 하는 개발자를 끌어모았다.

 ‘게임 유통의 명가’ 네오위즈의 명성은 ‘비즈니스 천재’ 나성균 대표에게서 왔다. 창업 직후 인터넷 접속 서비스 ‘원클릭’과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으로 대박을 터트렸고, 게임 분야에서는 중소 개발사의 게임 유통을 맡는 ‘퍼블리싱’으로 재미를 봤다. 게임 선구안이 탁월해 ‘크로스파이어’ 같은 게임은 중국에서만 연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런 나 대표를 업계에서는 ‘무역과 상업의 오나라를 이끈 손권’에 비견하기도 한다.

 삼국의 판이 흔들린 것은 올봄 네오위즈게임즈부터였다. 이 회사는 올 1분기 매출 1972억원에 영업이익 358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도 5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했다. 진행중이던 프로젝트들을 중단하고, 소수의 핵심 프로젝트는 별도의 스튜디오로 분사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임원들이 보직을 내려놓거나 회사를 떠났다. 해외 사업을 주관하던 한상우 본부장은 퇴사했고, 웹게임 전반을 지휘하던 박순택 본부장은 30여 명의 개발자를 데리고 나가 새 회사를 차렸다. 이는 회사 매출의 55%를 차지하는 ‘크로스파이어’와 ‘피파온라인2’ 두 게임의 판권 재계약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크로스파이어의 개발사 스마일게이트는 내년 하반기부터 중국 기업과 직접 현지 서비스를 하겠다는 입장이고, ‘피파온라인2’를 함께 만든 글로벌 게임업체 EA는 ‘피파온라인3’의 협력사로 넥슨을 택했다. 유통에 강하지만 자체 개발한 게임층이 얇은 위험요소가 노출되자 주가는 1년 전의 3분의 1이 됐다. 지분 14.8%를 보유한 2대 주주인 EA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현금 동원력이 있는 중국의 대형 게임업체가 인수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해졌다.

 엔씨소프트는 김택진 대표가 지난 6월 이유를 밝히지 않고 8000억원어치의 회사 주식을 판 뒤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임원들은 수십억원어치 주식을 현금화했다. 회사 측은 “최근의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심기일전”이라지만 게임 산업의 속성을 아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온라인 게임은 대대적인 투자로 작품 하나를 개발해 수익을 거두는 ‘고위험·고투자’ 사업이다. 김 대표가 주식을 매각한 시점은 엔씨가 5년간 500억원을 투자한 야심작 ‘블레이드앤소울’을 공개하기 직전이었다. 실적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할 시기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대표가 경영권을 지키면서 현금을 급히 구해야 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김택진 대표의 엔씨소프트 지분 14.7%를 사들인 김정주 회장은 김 대표의 라이벌이면서도 게임업계의 오랜 동지다. 회사의 정체성이나 사업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지분을 넘길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임 1세대의 삼국지는 ‘넥슨의 천하통일’로 일단락됐다. 판이 출렁이는 과정에서 국내 투자가 위축되고 인력이 빠져나가자 해외 업체들이 발 빠르게 국내로 치고 들어오고 있다. 중국 2위 게임업체 샨다는 지난 2010년 국내 개발사 아이덴티티게임즈를 1200억원에 인수했고, 매출 6조원대의 텐센트는 지난해 한국에 제1호 해외법인을 세웠다. 이외에도 중국 업체 더나인과 쿤룬, 일본업체 GREE가 국내 법인 설립과 개발사 인수·투자에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여기에 여성가족부의 ‘셧다운제’, 교육과학기술부의 ‘쿨링오프제’ 같은 관련 규제들이 쏟아지자 국내 기업의 게임 투자는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달에는 동양그룹 계열사 동양온라인이 25억원 손실을 감수하고 게임개발사업을 접었다.

 엔씨소프트와 네오위즈에서 나온 고급 개발인력이 어디로 가느냐도 업계의 관심사다. 이들을 흡수할 만한 자금이나 투자 계획을 가진 국내 게임업체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1위 넥슨은 가벼운 캐주얼 게임에 익숙하고, 최근에는 자체 개발보다 개발사 인수로 몸집을 불려왔다. 대작 온라인 게임 개발자에 대한 수요는 많지 않다는 얘기다. 중국이나 일본 업체는 개발 인재 확보의 적기를 만난 셈이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엔씨 직원이 모여 담배 피우는 곳에 중국회사의 스카우트가 낀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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