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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순수 미술 지원 흔들리지 않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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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27면

1 잭슨홍의 ‘시험장(Proving Ground)’, CNC milled ABS plastic·lacquer spray·MDF, 80x120x137㎝ 2 구동희의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 mosquito coils·parasol, 120x160㎝ 3 이미경의 ‘가림막(Fence)’, 합판·페인트·소품, 95x1358x177㎝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가를 키우는 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문화재단을 통해 유망 작가를 선정해 시상하고 전시 등을 지원한다. 삼천리그룹을 창업한 고 유성연 명예회장의 유산으로 1989년 설립된 송은문화재단의 ‘송은미술대상’(2001년 제정), 철 또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포스코 청암재단의 공모전 ‘스틸어워드’(2006년),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의 유지를 받은 양현재단의 ‘양현미술상’(2008년), 매년 주목할 만한 사진가를 뽑는 한진그룹 일우재단의 ‘일우사진상’(2009년), 두산그룹 연강재단이 고 박두병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10년 제정한 ‘두산 연강예술상’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그룹의 삼성문화재단은 상 대신 1996년부터 매년 파리 국제예술공동체 입주 작가를 1명 선발해 약 50㎡(15평) 규모의 아틀리에를 무료로 제공한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13년, 새 수장 맞은 에르메스 코리아

2000년 시작된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은 가장 오래된 상이다. 명품 중의 명품 브랜드인 프랑스 에르메스의 한국 지사가 1997년 파리 본사에 먼저 제안했다. 그래서 상 이름도 한글 그대로 ‘미술상(Missulsang)’이다.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젊은 현대미술 작가를 대상으로 한다.

처음에는 1명을 선정했다가 2003년부터 세 명의 후보를 내고 이들이 새로 만든 작품을 약 두 달간 전시한 뒤 1명을 뽑는 방식으로 바꿨다. 올해부터 세 후보에게 각각 주는 신작 지원금을 1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늘렸다. 최종 수상자에게는 2000만원의 상금과 상패를 준다.

특히 올해는 에르메스 코리아에 새 선장이 등장했다. 미술상의 기틀을 다져온 전형선 사장의 뒤를 이어 LG전자 스페인 법인장을 지낸 한승헌(51)씨가 7월부터 대표를 맡았다. 13회를 맞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향배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비즈니스와 미술상은 엄격히 분리”
지난달 26일 서울 도산공원 앞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3층 아뜰리에 에르메스. 올해의 작가 후보로 선정된 구동희(38), 이미경(46), 잭슨홍(41)씨와의 기자간담회 자리에 한 사장이 참석했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는 다국적기업 P&G, 코카콜라, NHN 등을 거친 마케팅 전문가다. 그는 “본사에서 6개월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지켜보기만 하라고 했다”며 “지금 여기서도 열심히 보고 있는 중”이라고 웃었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이 기업 마케팅과 직접 연관이 없는, 조건 없는 작가 후원 제도라는 점에 대해 그는 “솔직히 처음에는 손을 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커머셜 비즈니스와 미술상·재단은 엄격하게 분리돼 있어 바꾸는 게 사업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명확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브랜드와의 연관성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본사의 방침이 확고했습니다. 아트와 상품을 어설프게 연결하다가 망가지는 것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선을 명확하게 지키는 것이 좀 더 높은 단계의 마케팅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온 순수미술 지원 체제는 흔들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에 있을 때 갤러리를 제법 다녔고 에르메스 대표 제의를 받았을 때 가장 끌렸던 이유도 예술과의 돈독함 때문이라고 말한 한 대표는 전시를 본 소감에 대해 “그전 전시를 못 봤기 때문에 컨텍스트를 알 수는 없지만 (앞으로) 좀 많이 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론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롭고 실험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가져가는 것도 미술계 입장에서 보면 유니크한 장이 될 것”이라며 “다른 곳과 비슷한 것이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에르메스니까 주는 상이라는 공감 형성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계란판·모기향·가림막 독특한 상상
천장에 비치 파라솔이 매달려 있고 그 밑으로 알록달록 염색된 나선형 모기향이 촘촘하고 거대한 나선형 원뿔을 이루고 있다. 구동희 작가의 신작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다. 헬터 스켈터는 나선형 미끄럼틀이라는 뜻이지만 속어로 ‘허둥지둥한다’는 뜻도 있다. 비틀스의 노래 중 가장 시끄러운 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여러 가지 텍스트와 이미지는 ‘CII 966 856’라는 작품으로 연결된다. 컴컴한 미로를 빙글빙글 돌며 걷고 있으면 모기 앵앵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탄소(Carbon)’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희끄무레한 은회색 설치물은 마치 파리나 모기를 잡는 끈끈이가 연상된다. 구 작가는 “타들어가는 모기향이나 모기 소리, 비치 파라솔 등의 모습을 통해 시간 혹은 계절이라는 모뉴멘트를 관객들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미경(46) 작가의 ‘가림막(Fence)’은 도발적이다. 네모 모양을 이룬 177cm 높이의 하얀 벽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벽 앞에 놓인 다양한 높이의 받침대를 딛고 올라간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건너편 사람의 뻘쭘한 표정뿐. 담장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전시장에 뭔가 보러 간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오잖아요. 그런데 작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작품이 없다면 어떨까요. 벽 너머에 있는 것을 상상했다가 드러난 대상을 확인했을 때 느끼는 감정들, 즉 기대감과 당혹감, 희망과 실망, 웃음과 분노 등을 촉발하는 매개체로서 가림막을 이용해 보고 싶었습니다.”

‘대량 생산(Mass Production)’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온 잭슨홍(41) 작가는 20세기 산업사회를 코믹하게 비튼다. 실제보다 1.5배 크게 만든 덕분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낯설다. 펼쳐진 부채 혹은 싱크로나이즈 선수 같은 인상을 주는 분무기들이나 케이스에서 빠져나와 데굴데굴 굴러가는 계란들에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진다.

벽면은 다양한 이미지가 담긴 100개의 액자들로 빼곡하다. 미국 특허 검색 사이트에서 ‘Redemption(구원)’과 ‘Punishment(처벌)’라는 단어로 검색한 뒤 무작위로 선택한 그림 페이지를 50개씩 프린트했다. “한 시대의 쇠락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장영혜, 김범, 고 박이소, 서도호, 박찬경 등 역대 수상자들뿐 아니라 양혜규, 홍승혜, 정연두 등 후보에 오른 작가들도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이다. 전시는 7월 27일부터 9월 25일까지 열리며 최종 수상자는 9월 13일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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