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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는 끝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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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주말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이 개최될 강원도 알펜시아의 새로 지어진 반(半)야외극장 형식의 뮤직텐트에서는 대관령국제음악제의 일환으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됐다. 젊고 집중력 강한 성시연(서울시향 부지휘자)이 지휘봉을 들고 노련하고 농익은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인디애나주립대 교수)이 악장을 맡은 대관령국제음악제 오케스트라(GMMFS)는 소프라노 임선혜, 테너 김우경 등의 호화 캐스팅을 앞세우고 서울모테트합창단의 화음을 뒤에 세운 채 두 시간여에 걸쳐 참으로 놀라운 감동을 창조해 냈다. 3부 34곡에 달하는 대곡 ‘천지창조’ 중 특히 제24곡의 아리아는 천사 우리엘을 맡은 테너 김우경의 목소리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품과 위엄을 보이며, 아름다움과 힘과 용기를 갖추고, 하늘을 향해 세워진 그는 인간 곧 온 세상의 왕이라. 넓고 둥근 이마는 지혜가 깊은 징표요, 그 맑은 눈빛 속에서 창조주의 입김과 형상을 지닌 영혼이 빛나네….” 그렇다. 인간은 본래 영혼이 빛나는 존재다. 그것은 단지 신이 그의 모습대로 인간을 지었다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빛나는 진짜 이유는 그가 그 어떤 패배에도 굴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리라. 인간이야말로 패배를 패배시키면서 전진해온 존재 아닌가.

 #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 사건의 몸통이자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힌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세상의 가장 높은 권좌에서 날개는커녕 낙하산도 없이 곧장 추락한 형국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최악의 대통령이란 오명을 쓴 채 역사의 뒤편으로 영영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철저하게 파괴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94년 4월 22일 그가 81세를 일기로 서거한 직후 뉴욕 타임스 4월 25일자에 실린 윌리엄 사파이어의 명문 “미스터 컴백(Mr. Comeback)”은 닉슨을 ‘패배를 패배시킨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후 관뚜껑을 닫을 때까지 꼬박 20년 동안 닉슨이 자신에게 덮친 패배의 그림자 뒤집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인간은 패배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라고! 그렇다. 포기하지 않는 한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승리다. 그들의 오늘 승리는 피나게 땀 흘린 결과다. 하지만 오늘의 패배 또한 끝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오늘의 패배는 머지않아 뒤집힐 승리의 자궁이요 모태다. 아직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무엇도 끝난 것은 없다. 올림픽에는 필시 환호하는 승자와 눈물 머금은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금메달을 기대했던 왕기춘은 안타깝게도 노메달에 그쳤지만 오히려 그에게 떠밀려서 체급이동을 해야 했던 김재범과 송대남은 끝내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정말이지 세상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끝난 것처럼 보여도 끝난 게 아니다. 패배한 자일지라도 후회와 회한을 접고 스스로를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건져올리는 순간 승리는 스스로의 씨앗을 배태시키고 키워낼 열매를 준비하는 법! 패배를 딛고 절치부심해 다시 일어서는 자야말로 진정한 승자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님을 실증해 주는 것이 바로 올림픽의 살아 있는 정신이요 스포츠맨십의 정수 아니겠는가.

 # 올해로 쓰여진 지 꼭 60년이 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오직 한 구절에만 밑줄을 그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man is not made for defeat…).” 그 한마디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다. 비록 패배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리를 뒤쫓아 다니지만 인간은 결코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 패배를 패배시키며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게 진짜 승리이며 인간이 빛나는 영혼의 소유자인 증거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