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역사 그린 '메디치家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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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메디치 가문(家門) 의 한 주인공인 '위대한 로렌조(로렌조 디 피에로 데 메디치) ' 에게 바쳐졌던 마키아벨리의 묘사다. 로렌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사』에서 던졌던 이 찬사를 두고 시오노 나나미 또한 이렇게 감탄했다.

"범용한 역사가는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그리고 진실에 육박하는 간결한 묘사"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

로렌조를 포함한 메디치가문 전체가 운명과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14~15세기 신문명' 르네상스에 구현했는지를 담은 짭짤한 책이 신간 『메디치가 이야기』다.

이 책은 메디치가문이 쌓아올린 거대한 권력과 돈, 그리고 우아한 취미와 대추락의 3백년 흥망사에 관한 보고서다.

한국의 메디치가는 있는가

미술품과 장서 수집, 도서관과 대학 설립, 숱한 기념비적 건축물의 건립, 안목있는 예술 후원자 역할 등 메디치가의 문화사랑은 서양사의 신화이다. 그러나 20여년 전 영국 펭귄북(원제 'The House of Medici;It' s Rise and Fall' ) 으로 한차례 선보였던 이 책이 뒤늦게 한국사회에서 음미돼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국의 메디치가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 때문이다.

즉 반세기 넘어 달려온 산업사회와 그 안의 천민 자본주의의 우리 자화상 속에서 문화의 아우라를 구현하는 길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되묻게 하는 책이 이 신간이다.

이 책은 당시 인구 10만명에 불과한 피렌체의 금융업을 기반으로 번 떼돈과 사회적 책임 - 당시 유럽의 최고 영향력은 교황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 - 을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전유럽의 인문주의 운동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실은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책에서 새삼 확인하지만, 메디치 없는 르네상스도 상상할 수 없지만,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투자 없이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가능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즉 메디치에게 문화란 '끼워팔기 품목' 이 아니고, '확실한 투자' 의 대상이었다.

^다빈치, 보티첼리, 그리고 플라톤=이 책은 서양 문화사의 문예부흥기를 한 가문의 흥망사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도 사람이 많이 나와 혼란스러울 정도이지만, 등장인물의 면면은 초호화 캐스팅임이 분명하다.

로렌조가 탐독을 한 작가인 단테, 보카치오에서 어렸을 적부터 싹을 알아보고 키우다시피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이 대거 등장한다.

또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플라톤의 생일날이면 당시 최고의 그리스 학자들을 초빙해 담론을 하는 대목 등도 책 곳곳에 비친다. 놀라운 것은 이런 문화투자란 '한가한 여유' 가 아니었고, 외려 대낮에 성당에서 암살이 횡행하는 지독한 정치적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내분의 와중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 책에는 메디치 가문과 때로는 동반자로서, 때로는 원수지간으로서 수없이 동맹과 반목을 반복했던 역대교황들과 용병대장, 파치가(家) 등 라이벌 가문들이 대거 등장해 한 시대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한국판 메디치家는 없어

'한국에 메디치 가문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우울하다. 한국의 사회풍토는 메디치 가문이 등장할 소지 자체를 없애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최근 정부 여당이 '기부금품 모집 규제법' 개정안을 내놓았다가 여론의 된서리를 맞고 '일단 유보' 로 돌아선 것이 그 사례다.

문화예술계로 흘러가는 약간의 후원활동마저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준(準) 조세의 부담금' 으로 규정하려는 어리석음 말이다.

또 있다. 우리사회에는 하향 평준화 욕구가 너무 심하다는 점이다. 대학 기여입학제 논의 등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는 풍토 말이다.

반면 『메디치가 이야기』는 메디치가문이 대학의 설립과 재정지원, 교수초빙 등에 얼마나 열성이었는지, 그에 따른 사회적 존경을 얼마나 즐겼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확실히 우리사회는 르네상스 이전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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