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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부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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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부의 탄생
원제 The Birth of Plenty
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김현구 옮김
시아출판사, 576쪽, 2만5000원

600쪽 가까운 분량에 시간적으로는 중세에서 현대까지 포괄하는 데다가, 정치. 경제. 과학기술. 법률 등 여러 주제들이 갈마든다. 세계적 석학이 쓴 학술서로 짐작하기 쉽지만 저자 윌리엄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인기 높은 투자 관련 웹사이트의 설립자이며, 뛰어난 자산투자분석가이자 칼럼니스트다. 학자가 쓴 학술서와 다른 그 무엇을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경제적 번영에 필요한 요소들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살핀다. 둘째,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일본 등 역사상 부를 창출한 나라들과 이슬람 세계 및 라틴아메리카 등 뒤처진 국가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부와 행복, 민주주의, 세계 헤게모니 등의 관계를 논하고 미래를 가늠한다.

저자가 드는 경제적 번영의 필수 요소는 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유연하고 효율적인 자본 시장, 원활한 수송과 통신 이렇게 네 가지다. 이 조건들 가운데 하나만 충족시키지 못해도 부는 쌓이지 않거나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렇다 해도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요소가 있지 않을까? 우문현답은 이렇다. '케이크를 만드는 데 밀가루, 설탕, 쇼트닝, 계란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결정적인 재료인지 묻는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질문이다. 각 요소는 다른 모든 요소를 지탱하고 모든 것이 확고히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으면 어떤 것도 유지될 수 없다.'

예컨대 산업 발전의 핵심 기반이었던 증기 기관차와 전신의 발명은, 재산권이 촉진하는 인센티브와 과학적 정신,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또한 과학과 수학에 바탕을 둔 보험계리표가 18세기 보험업의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고, 보험업이 아니었다면 기업들은 위험을 관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위험관리능력이 없었다면 새로운 모험 사업을 위한 투자도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을 넓은 의미의 제도로 간주한다. 총체적 제도 미비의 실례를 찾자면 저자가 드는 역사적 사례들을 들먹일 필요 없이 북한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돌이켜본다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전에 저자가 제시한 네 가지 제도적 요소들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부족한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질문거리는 이뿐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를 통해서 중요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질문, 부의 축적과 민주주의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일까?

노련한 투자분석가다운 대답은 이렇다. '고도로 진전된 민주주의는 자본의 수익률을 하락시키고 투자 인센티브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번영은 민주주의를 낳는 경향이 있지만, 민주주의 자체는 번영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의견을 입증하는 대목에서 우리나라가 등장한다. '칠레, 타이완, 한국이 서구 수준의 부에 접근하기 시작한 이후 몇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나라들에서 민주적 제도들이 활력 있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성장이 이대로 지속될 수 있을까? 저자는 부가 증대하면서 정부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고 이것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부를 '교살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대목만 보면 저자가 고전적 자유시장경제론자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한 경제 성장과 사회적 통합의 상충에 관해 저자는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하면서, 사회. 정치적 불안정이 커질 정도의 불평등은 피하면서도 경제 성장을 보증할 수 있는 정도로 과세를 억제하고 재산권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런 최적점을 찾는 일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른바 미래 예측서들 대부분은 현재의 추세를 바탕 삼고 있다. 그래서인지 속도감 있게 술술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왠지 공허하다. 이에 비해 역사에 바탕을 둔 이 책은 읽는 동안 자주 오래 머무르게 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책 마지막에 철학자 산타야나의 격언-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그것을 되살 수밖에 없다-을 조금 바꾸어 인용한다. '경제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역사의 궤적 속에 뒤처질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

◆ 책갈피

"우리 중의 부자들이 우리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과도한 말은 아니다. 그들이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그들이 실제로든 전자매체를 통해서든 우리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비참하게 느끼게 된다…부의 불평등이 가장 적은 사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464쪽)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상당한 부의 불평등은 적당히 불편한 세부담과는 달리 상당히 해롭다. 부와 소득의 커다란 균열은,(후안무치하게 인기에 영합한) 페론 하의 아르헨티나에서 그랬듯이, 번영하듯이 보이는 경제를 탈선시킬 수 있다"(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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