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1급살인 다음으로 높은 형량 받는 범죄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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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제주 올레길 등에서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민심이 흉흉하다. 성범죄 전과자가 이웃에 살고 있는데도 이를 알 방법이 없고, 물러 터진 처벌과 형량이 성범죄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라며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정부와 여당이 성범죄자 신상공개 소급 적용 등 대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사건이 터졌을 때만 뒷북 정책을 내놓으며 부산을 떨다가 이내 용두사미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성범죄 증가 추이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미국처럼 추상같은 징벌로 처단해야 한다는 전문가가 많다.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박미랑(32) 교수에게 미국의 성범죄 대응법을 들었다.

2008년 5월 15일 미국 아칸소주 연방 법원은 텍사스 출신 제임스 린시컴에게 이런 형을 선고했다.
‘실형 298개월(24년10개월), 10년간 보호관찰, 정신건강 상담 및 성범죄자 교육 프로그램 이수, 성 범죄자 등록, 인터넷 사용 금지, 보호관찰관 허락 없이 아동과의 접촉 금지’.

린시컴은 2006년 9월 체포될 때까지 수십 편의 아동 음란물 촬영 및 소지, 6세 여아를 포함한 수 명의 아동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아동을 성폭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별도의 강간죄가 있어 가중 처벌된 사례다.

박미랑 교수는 “이 사건은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해 미국 사회가 얼마나 강력히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성범죄는 급속히 늘고 있을 뿐 아니라 수법도 흉포해지고 있다. 법무연수원 범죄백서에 따르면 살인·강도·강간·방화 등 4대 강력 범죄 중 강간범죄의 비율은 2001년 56.5%에서 2010년 72.5%로 늘었다. 성범죄의 죄질도 더 나빠지고 있다. 미성년자나 장애인 등 취약한 계층을 노린 악질 범죄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형사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범죄(강간·강제추행 등) 중 19세 미만 미성년자와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상대로 한 범행 비율이 2000년 18.7%에서 2009년에는 23.6%로 늘었다.

문제는 이게 우리 사회 성범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성범죄는 특성상 어느 나라든 신고율이 낮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심하다.
2008년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공식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33.4명이다. 같은 해 미국의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10만 명당 29.3명으로 우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형사정책연구원이 수행한 ‘2008년 한국의 범죄피해에 관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실제 피해자는 공식 피해자 수의 8배에 이르는 267명(10만 명당)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도 공식 범죄와 실제 발생의 괴리를 추적하기 위해 매년 미국 전역 13만5000명을 대상으로 범죄피해조사(National Crime Victimization Survey·NCVS)를 실시하는데, 이에 따르면 2008년 미국의 성폭력 범죄 피해율은 인구 10만 명당 80명으로 공식 통계(29.3명)보다 2.7배 많았다. 한국의 숨어있는 범죄(암수범죄) 비율이 미국보다 세 배 높은 것이다.

법·제도 허점 때문에 신고율 낮아
신고율이 낮은 이유는 문화적 배경도 있지만, 법과 제도상의 허점도 한몫한다. 성범죄 피해자는 조사 단계부터 고통을 겪는다. 피해자의 고통을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대질신문 등의 관행이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아동·청소년 등 성범죄 피해자가 조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보는 일을 줄이기 위해 대질신문을 최소화하는 등의 원칙이 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올해 3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되면서다. 그나마 아동·장애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일반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아직도 ‘실무적’인 이유로 대질신문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방한한 캐나다의 성범죄 심리치료 전문가 윌리엄 마셜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방에서 마주 보는 일이 있다면 이건 끔찍한(terrible) 일”이라고 말했다.
사법 절차에 들어간 뒤도 문제다. 성범죄는 여전히 친고죄이기 때문이다. 범죄백서에 따르면 강력범죄 중 강간 범죄의 불기소 처분 비율이 49.4%로 눈에 띄게 높다. 특히 불기소 처분 사유의 3분의 2가 ‘공소권 없음’이다. 이는 친고죄 조항에 따라 피해자가 고소나 고발을 취하한 결과다. 이런 고소 취하의 상당수가 가해자 측의 집요한 합의 요구 때문이라는 점은 상식이다. 26일 새누리당·민주당이 모두 성범죄의 친고죄 조항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재판 단계에 가서도 성범죄의 형량은 매우 낮다. 최근 수년간 성범죄가 잇따르면서 양형 기준이 강화되는 추세지만, 실제 법원에서 받는 판결은 크게 엄격해지지 않았다. 미국과 뚜렷이 대비된다. 미국 성범죄자의 경우 전과가 없는 초범(미수를 포함)이라 해도 기준 형량이 97~121개월에서 시작한다. 반면 같은 기준의 일반 강간 사건에 대해 우리나라는 30~60개월의 구간을 정해놨다.

기준 형량 자체가 낮은 데다 판사의 재량에 따라 형량을 높이고 낮출 수 있는 요인에도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게 가해자가 술을 마셨을 경우 음주에 따른 심신미약을 이유로 형을 낮춰주는 것(주취감경)이다. 통영사건 피의자 김모씨도 과거 성범죄 판결에서 주취감경으로 형량이 줄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취감경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면서 아동·장애인 대상 범죄에 이어 올해 3월 일반 성범죄에서도 이 기준이 사라졌다. 하지만 양형 기준 변경만으로 실형도 따라서 높아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여러 이유로 지금까지 성범죄에 내려진 실제 선고형량은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다. 미국에서 성범죄는 1급 살인 다음으로 평균 형량이 높다. 2011년 미국 양형위원회 통계를 보면 살인은 평균 241개월, 성범죄는 평균 125개월의 형량이 선고됐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2010년 일반 강간의 평균 형량은 38개월, 13세 미만 대상 강간조차 62개월에 불과했다. 실제 선고되는 형량이 양형 기준의 최저선에도 못 미친다.

미국은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도 철저하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열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 신문·소식지 등을 통해 이중, 삼중으로 공개된다. 스마트폰 앱도 여러 종류가 나와있다. 위치검색 서비스 life360이 제공하는 ‘offender locator(아래 작은 사진)’는 본인이 미국 내 어디 있건 인근에 있는 성범죄자의 주소와 상세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터넷·지역신문 등에 이중·삼중 공개
미국의 성범죄 엄벌주의는 1970년대 이후 90년대 초까지 성범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미성년 대상 범죄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94년 7월 뉴저지에서 발생한 7세 소녀 성폭행·살인 사건(메건 사건)의 여파가 결정적이었다. 피해자의 이름을 딴 신상공개제도가 도입되고 형량도 높아지게 된 계기다. 조사 결과 92년 이후 10년간 아동(12~17세) 대상 성범죄가 79%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엄벌주의를 지탱하는 요인이다.

물론 이런 엄벌 중심 제도가 성범죄자를 지나치게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재범 방지 효과도 미미하다는 반론도 있다. 90년대 이후 아동성범죄 감소도 엄벌보다는 사회적 관심이 늘고 치료 수단이 강화된 결과라는 주장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겉보기에만 엄벌을 내세운 뒤 실제 형벌의 집행은 느슨하고 관련 프로그램도 부실하다는 의견이다. 형사정책연구원 윤정숙 부연구위원은 “적절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호, 가해자의 사회복귀를 돕는 제도 등이 모두 필요하다”며 “어느 한 가지만 강화하는 것보다 정책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franc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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