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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삼나무 등 250만 그루 … 60대 간암 환자 “숲이 좋아 집 짓고 살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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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최승일씨는 바위에 바로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곧게 뻗은 편백나무가 최씨에게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최씨는 여기에서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돈도, 자존심도, 욕심도 모두 내려놓는 대신 건강과 웃음을 되찾았다고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픈 새끼는 결국 제 어미를 찾아간다. 갖은 방도를 다 써도 해결되지 않을 땐 부모의 품이 그리운 법이다.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숲을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숲은 태초의 인간이 가장 가깝게 여겼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천대받던 숲이 치유의 공간으로 재조명되는 이유다.

 숲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중에는 숲이 좋아 숲에 터를 잡은 이들도 있고 매일같이 찾는 이들도 있다. 2010년 서부지방산림청이 전남 장성 축령산에 ‘치유의 숲’을 조성한 이후 이 숲을 찾은 사람은 올해까지 3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장성 치유의 숲에는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인 258㏊에 편백나무와 삼나무·낙엽송 등 250만 그루가 있다. 50년 넘은 나무들은 아파트 6층 높이인 20여m에 이른다. 곧고 길게 뻗은 나무들이 내뿜는 길(吉)한 기운에 암환자를 비롯해 아토피와 천식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토피 환자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 암환자를 위한 환우 프로그램,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건강강좌도 활발하다. 모두 무료로 제공되는 프로그램이다.

 #1.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다. 고향은 강원도 강릉. 선친을 따라 경북 문경새재로, 직장을 얻어 경남 창원으로 거제로 흘러가며 살아오면서도 마지막 터가 전남 장성군이 될 줄은 몰랐다. 암이 그의 생을 숲으로 인도했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24일 장성 치유의 숲에서 만난 최승일(68)씨는 “숲을 만난 게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고 운을 뗐다. 12년간 착실하게 군 생활을 해온 최씨는 기대했던 중령 진급에서 누락되면서 12년간 몸담았던 군을 떠났다. 진급 때문에 결혼도 늦췄는데 전방에 있던 자신을 두고 다른 이가 중령 자릴 꿰찬 것이다. 쓰린 속을 안고 군을 떠난 최씨는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다. 남들보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동료들과 술도 열심히 마셨다. IMF 외환위기 때 세 차례에 걸쳐 7000명인 직원을 3000명으로 줄이는 ‘피의 숙청’이 있었지만 최씨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성실한 근무태도 덕분이었다. 24년간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하던 2004년, 퇴직자 62명 중 50대는 최씨 하나뿐이었으니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40여 년의 치열한 사회생활은 최씨에게 간암을 남겼다. 동네병원 의사는 국립대병원이나 서울의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진단 결과 간암 2기. 운이 좋아 바로 수술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수술 뒤였다. 병실에서 만난 간암·췌장암·황달 환자들을 보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대부분 수술 후 관리를 제대로 못해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된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생업에 뛰어들거나 식단을 조절하지 못해 몸이 망가진 환자들이었다. 그들을 본 최씨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은 생은 건강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 되뇌었다. 1997년 암으로 숨진 부인을 떠올리니 더욱 암을 이기고 싶어졌다. 최씨는 정 두고 살 터를 찾기 시작했다.

 책을 뒤졌다. 살기 좋은 곳,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을 넓힐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장성 치유의 숲을 발견했고, ‘여기다’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최씨는 꼼꼼하게 사전 답사를 했다. 보름 동안 편백나무가 울창한 축령산을 매일 오르내렸다. 동쪽 모암마을 쪽에서도 올라보고 남쪽 추암마을에서도, 북쪽 금곡마을에서도 올랐다. 625m 숲 정상에 오르자 여섯 개의 산자락이 길게 뻗어내려갔다. 어릴 적 자주 본 동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넋을 놓고 산세를 쳐다봤다. “내 평생 이런 날도 있구나.” 숲이 주는 매력에 반한 그는 그날로 숲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숲 아래 집을 짓고 그는 매일 새벽 치유의 숲을 찾는다. 오전 5시에 일어나 빽빽이 늘어선 편백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심호흡을 한다. 몸속으로 좋은 공기가 들어오는 걸 느낀다. 그러곤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물처럼 가네’. 숲에서 그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

숲길을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정신도 맑아진다.

 #2. 치유의 숲이 좋아 숲에 취직한 사람도 있다. 치유의 숲에서 ‘숲 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박현수(40)씨는 백혈병 환자다. 2007년 어느 날 광주의 한 병원 종합검진실에 근무하던 박씨는 퇴근 무렵 몸이 너무 피곤해 동료에게 농담 삼아 피검사를 부탁했다. 20분 뒤 퇴근하려던 그는 “산 사람의 피가 아닌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곧바로 병실에 입원했다. 그 순간부터 중환자가 된 그는 지금까지 백혈병과 싸우고 있다.

 박씨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자 삶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내가 행복한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언제 죽어도 좋으니 공부를 해서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체의학을 공부하던 박씨는 숲의 매력에 끌리기 시작했다. 숲의 치유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체험도 해보고 싶었다. 팍팍한 병실을 떠나 장성 치유의 숲을 찾은 박씨는 이곳에서 ‘완전한 자유’를 느꼈다고 했다. 명상과 호흡만 잘 해도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몸이 맑아지는 치유가 일어난다. 숲은 그런 곳이다.

엄마는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웠다. 숲은 둘에게 잊지 못할 데이트 코스가 됐다.

 욕심이 생긴 박씨는 숲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돌아오라 했지만 스트레스로 가득 찬 일상으로 되돌아가긴 싫었다고 했다. 결국 병원에서 숲으로 이직한 셈. “도시에서 오는 암환자들에게 ‘어차피 숲에 가봐야 죽는 건 똑같은데 뭐 하러 가느냐’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환자에겐 환자의 삶이 있는 거죠. 1년을 살든 10년을 살든 병원에 누워 있는 것보다 숲에서 마음껏 노니는 삶이 더 행복하지 않겠어요?”

 그는 매주 화요일 환우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진행한다. 모두 치유의 숲이 좋아 찾아온 환자들이다. 아토피나 스트레스로 고생하는 이들도 숲을 찾는다. 자연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호흡법, 기공체조법, 명상법 등을 가르치고 숲의 치유 능력을 알리고 있다. 그만큼 그도 행복해졌다.

“전엔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라는 생각에 갑갑했는데 지금은 숲으로 출근한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절로 가벼워져요.” 이렇게 복받은 직장이 있겠느냐고 그는 되물었다. 다음 꿈을 묻자 그는 “숲을 더 잘 알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답했다. 명상, 기공체조 등 치유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과 단순히 등산하는 것의 효과를 비교·연구하고 더 많은 이가 숲의 치유를 받도록 하고 싶어서다. 그는 그렇게 숲에서 삶을 찾았다.

 기자가 숲을 찾은 24일에도 엄마와 아이 30여 명이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주광역시 일곡동 아파트촌에 800평 논을 공동 경작하는 한새봉두레 회원들이다. 함께 씨 뿌리고 모내기하고 거둬들여 나눠먹는 공동체 실험을 하는 이들은 생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숲을 찾았다. 한새봉두레 박선화(49) 대표는 “이 일대 사람들 중에 축령산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며 “한새봉두레에 매주 모여 공부하는 ‘숲사랑팀’과 함께 1학기 종강 파티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두 시간 동안 숲을 거닐고 호흡과 명상을 한 이들은 치유 프로그램이 끝난 뒤 직접 재배한 고추와 오이 등을 펼쳐놓고 점심식사를 함께하며 숲의 효능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숲에서 만난 이중식(59)씨는 가족여행을 왔다고 했다. 등산을 싫어하는 대학생 아들을 설득해 산 대신 숲을 선택했단다. 불면증으로 몇 달간 잠을 못 이뤘다는 이영순(69)씨는 “좋다는 약은 다 써봤는데 눈도 점점 침침해지고 우울해져 숲을 찾았다”며 “처음 숲에 들어온 순간 반해 곧바로 근처 민박집을 계약한 뒤 벌써 두 달째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세 번째 왔을 때는 입에서 절로 시가 나오더라”며 아름드리 편백나무를 꼭 껴안았다.

장성=채윤경 기자

숲의 치유의 숲 효능은

아토피·불면증에 좋은 피톤치드 편백나무서 가장 많이 뿜어내
스트레스 줄이고 면역력 강화 … 숲에 들어서면 혈압 절로 낮아져

효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면역력을 강화해 질병을 예방하고 강도 높은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장기간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

 숲을 ‘녹색 의사’로 만드는 명의는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다. 피톤치드는 나무가 병원균·해충·곰팡이 등에 저항하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을 말한다. 편백나무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뿜어내고 구상나무·삼나무·전나무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피톤치드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성되는 코르티솔 호르몬의 혈중 농도를 낮춰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면역력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산림청이 숲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림 치유를 받기 전과 후의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한 결과 이 같은 효능이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숲이 아토피 치료에 효과적인 것도 피톤치드 때문이다. 피톤치드의 주성분인 ‘테르펜’은 독성을 중화하는 작용을 한다. 아토피와 각종 피부질환의 주원인인 집먼지 진드기 등이 싫어하는 ‘타닌’ 성분도 들어있어 피부염을 완화시켜 준다. 특히 가려움을 덜어줘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또한 피톤치드는 심신을 상쾌하게 유지시켜줘 불면증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숲에 들어가면 혈압이 절로 낮아지기도 한다. 일단 심리적으로 안정돼 교감신경의 반응 횟수와 강도가 줄기 때문이다. 고혈압 환자들은 숲을 찾는 것만으로도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 피톤치드의 양은 봄부터 증가해 여름철에 최대치에 달한다. 하루 중에는 정오 무렵에 방출량이 최대가 된다. 기온이 높아질수록 공기 흐름이 빨라져 피톤치드 발산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숲을 찾는 데 여름철 오후 1~3시가 가장 좋은 것도 이 때문이다.

 숲은 또한 인간에게 가장 적정한 음압(音壓)을 갖고 있다.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늘 소음 기준치인 80㏈을 웃도는 100㏈ 정도에 노출돼 있다. 반면 숲은 인간이 듣기에 가장 편안한 수준인 40~50㏈의 음압을 갖고 있다. 숲에서 오래 지낸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 비결이다.

 독일과 일본 등에서는 숲 치유가 오래전부터 활성화돼 왔다. 숲이 울창한 독일 바트 뵈리스호펜시는 인구가 1만5000여 명인 작은 도시지만 숲 치유를 위해 연간 100만 명 이상 방문하는 ‘치유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산림 테라피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산림청도 양평과 장성·횡성 등 세 곳에서 치유의 숲을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 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산음 치유의 숲(031-774-8133)은 서울과 가까워 많은 사람이 찾는다. 치유숲길, 맨발 체험로, 숲속 체조실, 자연 치유정원 등으로 꾸며져 있다. 산림 치유사가 상주하며 스트레스 예방 관리, 치유의 숲 걷기, 물 치유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에 자리한 청태산 치유의 숲(033-345-4451)에서도 매주 화·목요일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참여하려면 미리 전화로 신청해야 한다. 장성 치유의 숲(061-393-1777)에서는 매주 화요일 환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장성=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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