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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고독하고 행복은 소박하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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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호 32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파리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내 평생 본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비행기의 자기 옆자리에 앉는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데, 그녀는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곧바로 잠든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17>『백 년의 고독』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는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그녀를 자세히 뜯어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瑞康成)의 『잠자는 미녀의 집』을 떠올린다. 남성을 잃은 노인들이 마지막 사랑을 즐기는 곳, 그 집에는 처녀가 알몸으로 누워 있지만 깨울 수는 없다. 노인들은 대신 오랜 기억 속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사랑을 만끽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의 헌사에 이렇게 썼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One Hundred Years of Solitude)』도 기억으로 시작된다. “총살대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오래전 추억만이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기억도 소중하다. 우르술라는 나이 백 살이 넘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자 기억을 이용해 남들보다 훨씬 잘 보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물건까지 찾아준다.

『백 년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의 7대에 걸친 흥망성쇠가 줄거리다. 사촌지간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 부부는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고향을 떠나 마콘도 마을을 세운다. 너무 평화로워 공동묘지조차 없던 마을에 정부 관리가 등장하고, 바나나 생산업체가 들어오고, 철도가 부설되고, 마을 사람들은 전쟁에 휩쓸리고, 파업 사태로 학살을 당한다. 4년간의 폭우와 10년의 가뭄이 이어진 뒤 마콘도는 다시 폐허가 되고 부엔디아 가문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이 작품에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 환상과 신비가 숨어 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아주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그래서 마술적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하는데, 호세 아르카디오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을 보자.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터키인들의 거리를 통해 뻗어나가다 (…)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백년의 고독』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이처럼 숨 넘어갈 듯 이어지는 만연체 문장인데, 오랜 장마로 식량이 떨어지자 페르난다가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장면은 한 문장이 무려 4쪽이 넘는다(민음사판 제2권 175~179쪽).

소설 속에서 가장 고독한 인물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는 전장에서 친구에게 묻는다. “자넨 왜 전쟁을 하고 있는가?” 친구가 “위대한 자유당을 위해서”라고 답하자, 그는 말한다. “그걸 알다니 행복한 사람이군. 난 말이야, 자존심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네.”

그는 반군 총사령관이 된 날 밤, 겁에 질린 채 잠에서 깨어나 춥다고 모포를 찾는다. 권력에 대한 도취감은 사라지고 불안감이 찾아든 것이다. 그는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은세공 작업실에서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면서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40년 세월을 보내고 난 다음에야 소박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는데, 그러기 위해 서른두 차례의 전쟁을 벌여야 했고, 모든 협정을 죽음을 걸고 위반해야 했으며, 승리의 영광이라는 수렁에 빠져 돼지처럼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는 사업이 아니라 일 자체에 빠져들었다. 비늘을 이어 맞추고, 아가미에 광택을 내고, 지느러미를 붙이는 수작업은 엄청난 주의력을 요구했다. 구부린 자세 때문에 척추가 굽었으며, 세밀한 작업 때문에 시력은 감퇴됐지만, 완전한 정신집중으로 영혼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에게 노년을 좋게 보내는 비결은 고독과 명예로운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는 문 앞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곤 했는데, 뭐 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여기서 내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걸 기다리고 있소.”

소설의 결말은 묵시록을 연상케 한다. 오래전에 죽은 집시 멜키아데스가 양피지에 적어놓았던 일들이 부엔디아 가문에게 그대로 일어났던 것이다. “정해진 것은 일어날 것이다.”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월이란 원을 그리며 되풀이되는 것이다. 다만 이 지상에서 두 번째 기회는 가질 수 없다.
얼마 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인성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외신을 접했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꾼이 기억을 잃는다니! 참, 그때 비행기에서 만났던 여인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비행기가 뉴욕에 착륙하자 스스로 잠에서 깨어 내렸고, 그는 그녀가 꿈을 꾸던 좌석 옆에서 맨 처음 느꼈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제 그 여인은 쉰이 다 됐겠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잠자는 미녀’일 것이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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