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치의 덫에 걸린 유럽 구제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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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헌법재판관들이 지난 10일 유럽 재정안정기구(ESM) 위헌 소송 관련자들의 진술을 듣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카를스루에 로이터=뉴시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의 상설 구제금융펀드인 재정안정기구(ESM)의 7월 출범이 물 건너갔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 때문이다. 독일 헌재는 17일 “ESM 비준 절차를 중단시킬지 여부를 오는 9월 12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바람에 독일의 ESM 출자 절차가 최소 두 달간 올스톱됐다. 출자 비준안은 최근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 공포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ESM은 그리스 위기가 이탈리아·스페인 등으로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파제다. 출자금 5000억 유로(약 701조원) 가운데 90%가 모아지는 대로 이달 중 출범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ESM 지분 중 가장 큰 몫(27%)을 담당할 독일이 복병을 만났다. 일부 정치인은 올해 초 “ESM 출자는 위헌”이라고 헌법 소원을 제기하면서 비준 중단 가처분 신청을 함께 냈다. 이에 대해 가처분 신청의 수용 여부를 9월에나 내리겠다고 독일 헌재가 발표함으로써 EMS 출범이 자동 연기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일부 정치인의 헌법 소원 제기는 ‘왜 독일이 게으른 남유럽 사람들이 초래한 재정위기를 막아줘야 하느냐’는 국민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다급해졌다. 전문가들은 “정치인들의 헌법 소원이 메르켈의 취약한 리더십과 정치적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헌재의 결정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비상금(임시 구제기금)이 2400억 유로밖에 남지 않아서다. 얼핏 보면 거액이다. 하지만 그중 1000억 유로는 이미 쓸 데가 정해졌다. 스페인 시중은행에 투입될 예정이다. 남은 1400억 유로를 갖고 이탈리아·스페인 국채 매도사태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이다. 두 나라 국가 부채는 2조3000억 유로를 넘는다. 올해 안에 줄줄이 만기가 돌아온다.

 유럽 채권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17일 이탈리아·스페인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뛰었다. 두 나라 국채 10년물의 시장금리가 위험 수준(연 6%)을 다시 넘어섰다. 스페인의 경우 위기 수준(연 7%)에 육박했다. 이는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우려했던 일이다. 지난주 그는 “ESM 출범이 지연되면 유럽 상황이 다시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ESM이 9월 이후엔 출범할 수 있을까. 이마저도 불확실하다. 독일 헌재는 “9월 12일엔 가처분 결정만 내려진다”며 “ESM 출자가 위헌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게 아니다”고 밝혔다. 이른바 본안(위헌 여부) 심리는 그날 이후 시작된다.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면 일단 비준과 출자 절차는 재개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최종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 모든 것을 번복해야 한다.

 유로존은 ‘플랜B(대안)’를 갖고 있지 않다. 독일 헌재가 비준을 중단시키고 위헌 심사에 들어가기로 하면 국제 금융시장은 곧바로 요동칠 공산이 크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블룸버그통신 등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라면서도 “독일 국민의 정서를 감안할 때 헌재가 뜻밖의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독일의 저명한 경제학자 150명이 유럽의 금융감독기구 통합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투자자문사인 옥스퍼드메트리카 회장인 로리 나이트는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까지 그런 성명을 발표할 정도”라며 “남유럽 구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감이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라고 진단했다. 그는 “요즘 독일인들의 심리가 1차대전 직후 미국인들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고립주의에 젖어 정치·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글로벌 리더로서의 역할을 외면했다. 이는 파국(2차대전 발발)에 일조한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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