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80세 박의춘은 종횡무진하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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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원진
정치부 기자

9~13일 캄보디아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북한 대표인 박의춘 외무상은 80세다. 27개국 외교장관 중 최고령이다. 11일 새벽 2시 프놈펜 공항에 도착한 그는 오전 9시에 호텔을 나와 오후 4시까지 일정을 강행군했다. 7개의 양자회담 일정을 잡을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최근 민주·개혁을 추진 중인 미얀마 등 몇몇 동남아 국가들이 “이미지에 좋지 않다”며 난색을 표했는데도 박 외무상은 러브콜을 계속 보냈다. 이번 포럼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 ‘실리외교’에 집중한 셈이다. 12일 새벽에 도착한 김성환(59) 우리 외교통상부 장관과는 눈길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캄보디아 훈센 총리와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과는 두 손을 맞잡고 친분을 과시했다. 오후엔 기자회견까지 이례적으로 자청했다.

 64세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도 일주일간 해외순방을 강행군 중이다. 8일 일본을 시작으로 몽골·베트남을 거쳐 미국으로선 57년 만에 라오스를 11일 방문했다. 이날 오후 프놈펜에 도착해 ARF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중국의 뒷마당으로 불리는 이들 동남아 국가들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11월 미국이 선포한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 전략의 일환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게 미국의 포석이다.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캄보디아·태국 등과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ARF 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놈펜의 ‘평화 궁전’도 중국이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지어준 건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외교부 장관만 국회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좋은 외교활동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11, 13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논란 때문에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참석하느라 현지 외교활동은 12일 하루밖에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한·미·일과 한·중 회담이 고작이다. 매년 열렸던 한·일 양자 외교장관 회담도 정보협정 논란을 의식해 취소했다.

 당초 10~11일 예정됐던 한·메콩 외교장관 회의와 한·아세안 외교장관 회의는 김 장관이 의장임에도 제2차관이 대신 참석하는 결례를 범했다. 현지에 파견된 외교부 당국자는 ARF 현장을 취재 중인 한국 기자들에게 “북·미와 남북 대화 등 전통적 외교 이슈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외교의 축이 이동 중인 현실을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한·미·일 군사동맹에만 치중하려다 한·일 정보협정 사태라는 ‘외교 참사’를 일으켜 거시적인 외교 전장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건 다름 아닌 우리 청와대·외교부·국방부다. 우리가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 일본은 핵무장과 집단적 자위권까지 주장하며 군사대국화 전략을 착착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