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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푸틴의 동방정책, 황금 같은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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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대기자

러시아의 푸틴 정부가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유치하려고 할 때 러시아 정부와 기업, 학계와 언론계의 친서방파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푸틴의 속셈을 알았다. 푸틴은 블라디보스토크 APEC을 전통적인 유럽 중시 외교를 재조정해 아시아 중시로 전환하는 상징적인 행사로 계획했다. 푸틴은 부총리 이고리 슈발로프에게 시베리아·극동 개발을 담당할 자치주개발공사의 청사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개발공사는 국내외 민관 투자 1000억 달러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전 재무장관 알렉세이 쿠드린과 현 재무장관 안톤 실루아노프가 반대에 앞장서는 바람에 민간기업들이 투자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권위에 도전할 사람이나 세력이 없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시베리아·극동 개발에 대한 유럽파들의 반대를 누르지 못하고 타협했다. 자치주개발공사를 만들려던 야심적인 계획을 수정, 극동개발부를 신설해 하바롭스크주 지사와 중앙정부의 대표를 겸하고 있는 빅토르 이샤예프를 장관에 임명하고 시베리아 개발에 관한 한 재무장관에 버금가는 권한을 맡겼다. 푸틴의 비전으로는 APEC 회의가 열리는 루스키섬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다리는 러시아와 아시아의 접점을 상징하는 것이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장 시설은 신설된 국립극동대학 캠퍼스로 활용해 이 대학을 신흥 명문으로 키울 생각이다.

 푸틴의 이런 동방정책은 미국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아시아 중시(Pivot)와 중국의 부상과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 국가들에는 새로운 도전이요 기회다. 러시아는 특히 한국을 아시아·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비행기로 불과 2시간 거리의 방대한 극동·시베리아에서 열리는 외교·안보·경제적인 기회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러시아 지한파들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 소장 미하일 티타렌코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서울을 왕래하면서 한양대의 김연준 총장, 조지워싱턴대의 김영진 교수, 샌프란시스코의 방찬영 교수들과 함께 한·소 수교의 밑그림을 그리고 준비를 하는데 헌신한 한·소 수교의 일등공신이다.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만난 티타렌코는 수교 이후의 한국의 대러시아 외교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한국에 갖고 있던 환상이 깨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북한을 종단해 남북한을 잇는 가스관 건설을 포함한 시베리아 투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시베리아 투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미국이 개입해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티타렌코는 러시아 정부와 학계의 많은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인 노다리 시모니아와 빅터 숨스키도 동아시아재단이 출간하는 ‘글로벌 아시아’ 2012년 여름호에 공동으로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은 남북 종단 가스관 계획이 논의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합의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미국은 방해를 했다.” 러시아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한·러 관계에 가교 역할을 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문제다.

 장기집권의 궤도에 올라선 푸틴은 러시아 운명의 적어도 절반을 극동·시베리아 개발에 걸었다. 친서방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반대와 방해가 있어도 푸틴은 주춤거리면서도 동방정책을 밀고 나갈 것이다. 러시아의 아시아 등장은 궁극적으로는 부상하는 중국, 전략적으로 아시아에 복귀한 미국과 함께 파워 트로이카를 형성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외교·안보의 생존전략을 미국이라는 광주리 하나에 쓸어담았다. 그러다 반짝 중국 바람이 불자 ‘중국 외교 강화다!’ 하고 법석을 떨지만 미국의 족쇄를 못 벗고 있다. 요즘 우리는 미국 편향외교의 부작용을 많이 목격한다.

 한국의 장기적인 생존·번영 전략은 대미국·중국·러시아 외교의 균형 위에서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대미 외교는 현상을 유지하고, 대중 외교는 중층적인 공공외교를 최대한으로 확산시켜 긴 시간을 두고 과실을 따야 한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시베리아에서 미국 눈치 안 보는 경제외교를 펴야 한다. 시베리아를 교두보로 러시아를 활용하면 대북한 지렛대를 하나 얻고 중국의 과도한 역할을 줄일 수 있다.

김영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