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찾아도 노가 없다. 초조하다. 그때 갑자기 손에 모래 아닌 것이 잡힌다. 광명이 이런 것일까? 인간이 아닌 것에 감사하고픈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1952년 4월 23일 새벽 2시쯤. 강원도 통천군의 한 해변에서 북한 인민군 소속 김형갑 분대장은 탈출을 감행했다. 낮에 모래밭에 파묻어 놓았던 노를 찾자마자 고깃배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바다를 건넜다. 얼마 후 배는 미군 군함과 만났다.
다음 달 서울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 고(故) 김형갑(1930~93·사진) 캐나다 마니토바대 교수(전기공학)의 6·25전쟁 시절 일화다. 김 교수의 인생 역정은 파란만장하다. 서울대생→인민군→전쟁포로→캐나다 교수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인생엔 굴곡진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50년 7월 서울대 49학번 전기과 학생이던 김 교수는 서울에 있다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 이후 북한군의 전세에 따라 평양·강계·중국 훈춘 등을 돌며 전쟁을 겪었다. 52년 인민군에서 탈출한 후엔 전쟁포로가 돼 부산의 한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그해 7월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모교인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만 것이다. 북한군 전력이 발목을 잡았다. 김 교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지만 몇 년 뒤 가족의 권유로 이리 공대(전북대 공대 전신)에 들어갔다. 졸업 후 58년엔 미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났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65년 캐나다 마니토바대 교수가 된 후 27년간 근무하다 지난 93년 별세했다.
김 교수의 사연은 최근 그의 고향 친구이자 대학 동기인 유태용(82) 한국방재협회 명예회장에 의해 알려졌다. 유 회장은 지난달 서울대 측에 장학금을 기부하며 김 교수의 사연에 대해 말했고 서울대 측은 김 교수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김 교수가 북에서 탈출한 지 60년 만이다.
그의 전쟁 경험은 『나의 편력-내가 겪은 6·25』란 회고록에 담겨 있다. 부인 송영순(74)씨와 조카 김준철(74)씨가 김 교수의 유고를 정리해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