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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국수 주방장의 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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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지난 6월 8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 간의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메밀 막국수 주방장으로 소개받은 최성일(38)씨가 수많은 관중의 환호와 응원 속에 힘차게 시구를 했다. 이어 6월 23일 제주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 포항 스틸러스 간의 프로축구경기 전에는 50년간 양복재단사를 해 온 고경진(68)씨의 힘찬 시축을 보고 수많은 관중이 환호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주로 연예인·고위관료·경영인들의 식전행사에 익숙했던 관중은 서민중의 서민인 이들이 그라운드에 선 모습을 보고 무척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미소금융으로부터 생업자금을 대출받아 제2의 삶의 터전을 다시 일궈 낸 영세자영업자였다. 꿈의 그라운드에서 어려움과 실패의 과거를 팔로 던져버리거나 발로 차버린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부채의 늪’에서 빠져나와 되찾은 보람과 희망을 그들과 같은 처지의 또 다른 사람들에게 힘차게 전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대기업과 대형 은행이 참여해 2010년 1월 시작한 미소금융사업은 영세사업자들에게 지난 6월 말까지 3만2000건, 4130억원을 대출했다. 이들은 저소득·저신용사업자이기 때문에 은행은 물론 제2금융권으로부터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결국 대부업체나 불법 사금융시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으나 미소금융 대출조건에 부합하면 무보증·무담보로 연 2~4.5%로 최고 5000만원까지 사업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됐고 현재 평균 1400만원씩을 대출받아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서민의 눈물은 이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며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경제 민주화’의 한 모습이 된다. 이들은 희망과 보람이 보편적 복지나 무상복지보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일자리와 생업자금 마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 이런 자영업자들 사정이 좋지 않다. 유로존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가계부채 누적과 실물경제 침체로 가계와 중소기업의 신용부문에 적신호가 켜졌다. 서민가계와 중소기업, 영세사업체는 돈 빌리기가 더욱 어렵게 됐다. 은행권 대출 규제 때문에 대부업체로 몰리는 풍선효과로 불법 사금융 시장이 오히려 확대됐다. 서민경제의 버팀목인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한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위험한 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느끼고 폐업의 악몽을 두려워하는 실정이다.

 한편에서는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제 민주화’가 갈수록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경제 민주화 조항’이라는 헌법 제119조 2항은 지난 4월 총선 이전부터 정치인·경제학자·경제단체 간에 선거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서로의 인식차이가 워낙 뚜렷해 이제는 ‘원조’ 논쟁으로 이어져 선명성 경쟁이 한층 뜨거워지고 있다. 경제 민주화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야 어떻든 간에 대부분의 국민은 거창한 담론이나 구호보다는 실제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고 가슴에 와닿는 구체적인 해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 노력의 하나로 정부는 은행권의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 대상자에게도 새희망홀씨 대출을 해주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어려운 처지의 대출자가 상환불능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한 저축은행에서 20%대 높은 금리로 대출받던 이들이 은행권에서 10%대에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폐업한 이들이 86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부채와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지원하는 정부 차원의 서민금융 프로그램이 있지만 대기업 차원에서의 프로그램은 미소금융 사업이 가장 대규모다. 이미 6대 기업은 1조원의 출자금으로 2010년부터 10년의 일정으로 저소득층·저신용자에게 낮은 금리의 생업자금을 대출해줘 회생의 일터를 가꿔주고 있다. 무담보·무보증이지만 연체율도 4%대에 머물고 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올라오는 그분들의 체험수기를 읽으면 미소금융의 존재 이유에 자긍심을 갖게 된다. 기업의 잘못을 비판도 하지만 확실한 장점을 더욱 살릴 수 있도록 해 미소금융 6대 기업을 100대 기업으로 확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출자금으로 더 많은 저신용 영세사업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양극화의 다리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 방안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신헌철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