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반한 한국 <54> 미국인 매튜 앰브로시아 교수의 부산 사직구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11년 전 한국에 맨 처음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마치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걸 증명해 줄 신분증까지 있었다.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외국인 등록증(Certificate of Alien Registration)’의 ‘Alien’은 ‘외국인’ 외에 ‘외계인’이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적응하기 힘든 문화 충격이 쓰나미처럼 덮칠 때도 많았다. 반면 “미국에서는 왜 생각도 못했을까” 싶은 신선하고 진귀한 경험도 왕왕 했다. 한국인 친구들과 같은 그릇에 담긴 찌개를 나눠 먹은 날이 바로 그랬다. 결벽증이 있는 친구도 찌개 그릇에 숟가락을 푹 담가 국물을 맛있게 떠먹었다. 나도 이내 스스럼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훨씬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야구도시 부산에는 야구 경기 규칙을 몰라도 야구장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경기가 있는 날 사직구장은 온통 파티장이 된다. [송봉근 기자]

나한테 한국은 곧 부산이다. 오랫동안 부산에 살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사직구장이다. 남자라면 으레 그렇듯이 나도 야구 매니어다. 하지만 사직구장에서 야구는 그냥 야구가 아니다. 나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모르면서 야구장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을 이곳, 사직구장에서 만났다.

한국의 야구장은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을 만큼 볼거리가 풍성하다. 사직구장은 그중에서도 말하자면 ‘지존’ 축에 든다. 부산 사람의 야구 사랑도 한몫했다. 부산 사람들은 흔히 ‘구도 부산’이란 표현을 쓴다. ‘야구 도시 부산’의 줄임말이다. 부산 홈팀인 ‘롯데 자이언츠’(이하 롯데)에 대한 열기도 뜨겁다. 그래서 사직구장에서 야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부산 전체는 파티장으로 돌변한다.

운 좋게 1루 응원석 쪽 좌석을 얻으면 치어리더의 응원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송봉근 기자]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도 사직구장에 가면 신나게 응원곡을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야유하고 또 찬양한다. 모든 야구 선수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응원 구호가 있다. 롯데 팀도 마찬가지다. 타자나 투수가 바뀔 때마다 롯데 팬은 용케 외운 응원곡이며 구호를 목청껏 외쳐댄다. 운 좋게 1루 응원석 쪽 자리를 잡는 날은 흥이 배로 돋는다. 롯데 치어리더들의 섹시한 율동을 보노라면 심장이 아주 터져버릴 것만 같다.

사직구장 최고의 진풍경은 경기 말미에 펼쳐진다. 롯데 응원단이 깨끗한 뒷정리를 위해 나눠주는 쓰레기봉투가 그 주인공이다. 롯데 팬들은 거기에 쓰레기 대신 공기를 채워 각양각색 응원도구를 만든다. 롯데 팀 관람석에 주황색 쓰레기봉투 물결이 번질 즈음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산 갈매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부산 사람의 긍지가 넘쳐 흐르는 노래다. 사직구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한국 야구장은 관람료도 합리적이다. 사직구장의 경우 일반석은 7000원, 베이스라인에 가까운 명당자리도 1만 원이면 충분하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장은 1인 입장료가 27달러(약 3만1000원)에 달하지만 외야석은 너무 멀어서 경기가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또 미국에서는 야구장에 입장할 때 음식을 입구에 맡겨뒀다가 이닝 사이 허락된 시간에만 먹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사직구장에서도 경기를 즐기며 치킨·김밥·맥주·피자 등을 먹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치킨과 맥주 없이 야구를 보는 이가 되레 드물 정도다.

롯데가 승리하던 날 나는 영원한 사랑, 내 약혼녀를 얻었다.

주말이면 사직구장은 2만8000여 관중석이 모조리 매진된다. 입장권을 미리 사두지 않으면 야구장 문턱도 밟기 힘들다. 경기 하루 전까지 부산은행 창구나 롯데 팀 홈페이지(giantsclub.com)에서 예매를 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나는 뼛속까지 부산 사람이 돼가는 기분이다. 외계인 같다는 이질감은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직구장의 도움이 컸다. 올해 초부터 사귄 여자친구와도 야구장에 다니면서 더 애틋해졌다.

얼마 전 우리는 여느 때처럼 야구를 보러 사직구장에 갔다. 김주찬(31) 선수의 홈런으로 롯데는 초반부터 경기를 리드했고 결국 6대 3으로 승리했다. 그날 저녁 나는 북받치는 심정으로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이 꿈결 같은 나날을 평생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그러고는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줬다. 그날 롯데는 승리를 얻었고, 나는 약혼녀를 얻었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날이었다.

정리=나원정 기자
중앙일보·한국방문의해위원회 공동 기획

 
매튜 앰브로시아(Matthew Ambrosia)

1976년 미국 텍사스 출생. 고향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 음식과 문화에 빠져들면서 자연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1년 9월 선교활동을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4년 뒤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고, 현재는 부산가톨릭대학교 환경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외국인 독자 여러분의 사연을 받습니다 한국방문의해위원회 담당자에게 사연(A4 2장 분량)과 사진, 연락처를 적어 e-메일(jjijin@visitkoreayear.com)로 보내주십시오. 원고가 선정되면 한국방문의해위원회에서 소정의 고료와 롯데월드에서 자유이용권 2장을 드립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