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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174일이나 놀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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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북악산 기슭의 적막한 관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이었다.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삼키는 남편을 보면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남편은 침묵했다. 대신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2002년 두 아들이 구속됐을 때를 회상한 글이다(『동행』). DJ 본인은 자서전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발 밑이 꺼지는 듯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요즘 심경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들들’을 이상득 또는 최시중·박영준으로 바꾸면 말이다. 이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논란이 없던 2월에도 “가슴을 칠 때가 있다. 정말 밤잠을 설친다”고 했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오로지 이 대통령 탓이다. 그로 인해 앞선 대통령이 겪었듯 이 대통령도 가파른 내리막길을 곤두박질치다시피 하고 있다. 리더십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레임덕이다. 청와대에서 “요즘 말 안 듣는 공무원에게 불이익을 주려면 징계 대신 승진시켜야 한다. ‘오지(奧地)’로 보내면 신분 세탁하고 다음 정부에서 중용될 테니…”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권에선 아예 일에서 손을 떼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도 “조용히 정권을 넘겨줄 준비를 하는 게 합당하다”(이상돈)고 말한다. 직접 정책 집행을 막기도 했다.

 이는 그러나 정치권의 오만이다. 대통령을, 청와대를 김 빼고 맥 놓게 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일하라고 채근해야 옳다.

 우선 대통령직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격무다. 나라 살림살이란 말이 공연히 있는 게 아니다. 열심히 한 건 표가 잘 안 나도 잠시 손 놓은 건 금방 드러난다. 역대 대통령이 임기 초반엔 위기를 극복하지만 말기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 건 레임덕 탓이 크다. YS는 환란 위기를 겪었고, DJ는 신용불량자 양산을 가슴 아파했다. 이 대통령도 가계부채로 한걱정 한다. 더욱이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이다. 한시도 방심해선 안 되는 때다. 환란 때 허송했던 YS가 반면교사다.

 정치권이 일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선거 때엔 훼방놓기까지 한다. 1997년 11월 금융개혁법안이 통과됐어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조건이 그토록 혹독했을까 지금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DJ는 환란 위기를 극복한 대통령이지만 동시에 환란 위기를 초래한 일말의 책임이 있는 야당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핵심 법안 처리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YS는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의 눈에 표밖에 안 보인다”고 한탄했었다. 그나마 역사적 평가를 의식해 포퓰리즘에 버티는 게 현직 대통령이고 청와대다.

 김재익 경제수석부장처럼 경제 분야는 그래도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할 ‘인재’들이 있다. 외교안보 분야는 대통령에게 달렸다. 게다가 어렵고도 미묘한 분야다. 대통령도 자신감을 갖는 데 1년 이상 걸린다. 더욱이 전 세계가 리더십 교체기다. 우리뿐 아니라 상당수 다른 국가 지도자들도 ‘초보’란 뜻이다. 외교안보, 특히 안보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닐 수 있다. 현 정부의 선택이 정 불안하다면 국회가 옆에서 챙기면 된다.

 차기 정부의 정치 일정이 만만치 않기도 하다. 집권 2년차에 지방선거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로했듯 “일을 하려면 지지율이 있어야 하는데 일을 하면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딜레마 상황이다. 당장 인기가 없더라도 국가경쟁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중앙부처들의 세종시 이전도 예정돼 있다. 특히 주요 부처가 옮겨가는 올 12월부터 내년까지는 어수선할 게 틀림없다.

 이런데도 일하지 말라? 임기 말, 아니 적어도 대통령 당선인이 본격 활동에 들어가는 12월 26일 이전까지 174일간 일할 의지가 있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놀’ 명분을 주는 거다. 그에 따른 국정 공백 피해는 국민이 보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늘 “마지막 날까지 일하겠다”던 이 대통령이 2일 국회 연설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했다. 원고엔 ‘일하겠다’로 돼 있는데도 그랬다. 이 대통령이 비로소 정치권의 말을 듣겠다는 건지 갑자기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