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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수전노와 미친 자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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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전국을 돌며 장승 사진을 찍고 다니는 한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원도의 어느 도로 건설 현장에서 초로의 한 노인이 깃발을 들고 건설 차량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일을 하더란다. 말을 건네보니, 단순한 일이니만큼 보수는 적지만 노인은 그 일자리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라는 거였다.

"딸린 식구가 많은가 보지." 그런데 웬걸, 내 말에 친구는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아냐. 나도 그런가 싶었는데, 물려받은 땅값이 얼마 전에 크게 뛰는 바람에 백억대의 부자가 됐다는 거야." 친구의 말에 따르면 노인은 일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저축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수전노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한 바 있다. "자본가는 합리적인 수전노이고 수전노는 미친 자본가다." 이 구분에 따르면, 그 노인은 미친 자본가, 즉 수전노에 해당한다. 돈이 있어도 제대로(혹은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라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돈을 '수집'하는 것 자체가 삶의 행복이라는 수전노의 자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정작 지금 이 나라의 문제는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noblesse oblige, 즉 상류층의 고상한 의무를 행하는 부자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이다. 서른세 살짜리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는 걸 부자(父子)의 의무이자 부자(富者)의 의무로 여기는 게 이 나라의 대표적인 상류층 아닌가? 그 부자는 합리적인 수전노(자본가)로 자칭하고 싶겠지만 실은 앞의 노인처럼 미친 자본가에 불과하다.

자본가와 수전노를 합리성(쉽게 말하면 '미치지 않고 멀쩡한 제 정신')으로 구분하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사실 마르크스보다는 막스 베버다.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하는 조악한 유물론과 경제 결정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탈을 쓰고 있던 20세기 초반, 베버는 자본주의를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당시 소비에트의 관료나 학자들보다 더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개 학자라면 뭔가에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성격이 괴팍한 사람을 연상하는데, 베버는 그런 선입견을 완전히 불식시킨다. 그는 마치 오늘날의 회사원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부터 그는 칼뱅주의를 신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04-5년에 발표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칼뱅주의를 비롯한 정신적·종교적 요소들이 자본주의를 낳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 전까지의 정치경제학,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 과정은 대략 이렇다. 중세 사회가 해체되면서 유럽에서는 무역과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따라서 큰 돈을 벌게 된 상인들이 수공업자들을 모아 공장을 세우고 산업 이윤마저 독점했다. 그러자 봉건 영주들은 이윤을 좇아 스스로 장원 경제를 해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임금 노동자층을 이루게 되며, 이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했다.

말하자면 상인과 영주들의 금전욕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이야긴데, 여기에는 의문점이 따른다. 부에 대한 집착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다. 베버의 말에 따르면, "금전욕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중세 말기 상인들의 금전욕만이 자본주의를 낳을 수 있었던 걸까?

정치경제학적 설명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 그래서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대답을 찾는다.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고 목가적 분위기가 붕괴하자, 상당한 재산이 모아져도 이자를 노리는 대부금으로 사용되지 않고 사업에 재투자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를 낳은 것은 새로운 정신, 즉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었다." 부자와 수전노는 언제나 있었으나 자본가는 자본주의 시대에 탄생했다. 바꿔 말해서 자본가란 돈이 있기 때문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투자의 정신이 있기 때문에 투자하는 사람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다.

그럼 그 합리성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걸까? 종교와 연관되어 있으니까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되겠다. 합리성의 정신은 종교개혁 이후 탄생한 신교, 특히 칼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던 루터는 세속적인 직업 노동을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이라고 말했으며, 칼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신의 소관으로 돌리는 예정론을 주창했다.

그에 따르면 누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지는 (이미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그것을 확인하는 길은 오직 현세에서 성실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뿐이다. 현세에서의 삶에서 거둔 성공은 내세에서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같다. 쉽게 말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해서 신교, 즉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직업은 '신의 소명'이 되었다(직업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calling'은 원래 '신의 부르심'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신의 소명이라면 당연히 부정하거나 비양심적이거나 지나치게 탐욕스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태도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윤리는 바로 금욕이다.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벗겨 냈다." 금욕의 정신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자세가 나왔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었던 부에 대한 욕구가 자본주의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금욕에 기반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금욕의 정신은 이미 베버의 시대(20세기 초)에도 많이 퇴색해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건전한 기업가 정신 대신 이윤을 향한 자본의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의지가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도 그런 판에 기형적인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자칭 '토착 자본주의', 타칭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에서 합리적인 수전노와 미친 자본가가 헷갈리고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남경태(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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