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가계부채, 미봉책으로 풀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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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가계부채가 심상찮다. 우선 912조원의 규모 자체부터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올 들어 증가세가 둔화됐지만, 냉정히 보면 ‘불황형 둔화’라고 해야 한다. 빚을 늘리기 어려울 만큼 경제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부채의 질이 급속히 악화된다는 점이다. 부채가 많아도 상환능력이 뒷받침되면 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가처분 소득 정체, 주택가격 하락으로 5월 은행권 가계부채 연체율이 0.97%로 뛰어올랐다. 다중(多重)채무자와 저소득층, 그리고 자영업자들의 생계형 부채가 급증하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현재 금융당국의 판단은 “위기 단계는 아니며, 여전히 가계부채는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정리된다. 한쪽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한국 가계부채가 위험하다”는 보고서 때문에 지나치게 불안해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체 맥락의 의미는 다르다. 이들 보고서는 “한국의 기업과 정부 부문은 괜찮고, 가계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지적하며 “외부 충격이 발생하거나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 10~20% 가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담은 수준이다.

 가계부채 논란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각종 ‘종합대책’들이 나왔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뾰족한 대책이 없자 정책 당국자들은 책임 떠넘기기에 골몰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한국은행이 통화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쪽이다. 이에 대해 한은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하지만 가계부채는 15년간 누적된 정책 실패의 종합판이다. 초저금리의 장기화, 서민 금융을 내세운 도덕적 해이, 부동산 불패 신화를 맹신한 가계의 탐욕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제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들과 함께 ‘잠재적 신용불량자’의 대출금리를 낮춰주고, 원금은 장기분할 상환하는 프리 워크아웃을 추진하기로 했다. 과천 경제부처에선 재정을 투입해 서민신용보증기관을 세우고, 정부의 보증으로 서민들의 20%대 고금리 부담을 덜어주는 아이디어를 물밑에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리 사다리를 촘촘히 해서 은행권과 제2금융권의 금리 단층을 메워주기 위한 미시적 대책이다. 이제 한은도 더 이상 방관할 때가 아니다. 정부와 발맞춰 금융기관이나 자산관리공사 등을 통해 총액한도대출을 하든, 저리로 융자하든 저신용자들을 돕는 데 팔을 걷어붙여야 할 것이다.

 사실 그동안 가계부채의 미시적 대책들은 나올 만큼 나왔다.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변동금리 대출을 고정금리와 분할상환으로 바꾸는 대출구조 개선, 위험 대출과 편중 대출에 대한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의 위험가중치 상향 조정 등이다. 이제는 이런 대책들을 우리 경제가 감내하고 시장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서 실효성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가계부채 연착륙의 핵심은 상환능력에 맞게 부채 수준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준금리를 급히 올리거나 가계대출 총량을 갑자기 줄이는 조치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시장에 과도한 충격을 미쳐 대출 부실→금융 불안→소비 위축→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대출을 통제하면 서민들만 피해를 본다.

 이제 기재부·금융위·국토부와 한은이 유연하게 공동 대응에 나서야 한다. 다중채무자들의 퇴로를 열어주면서, 부동산 침체가 금융부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야 할 것이다. 한시적으로 취득세·거래세 감면을 통해 부동산 가격의 지나친 급락은 저지할 필요가 있다. 가계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부동산 신화를 맹신해 무리하게 빚을 내면 파산을 피할 수 없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빚 탕감(蕩減)’의 달콤한 유혹으로 가계의 도덕적 해이를 부채질해선 안 된다. 금융권도 상환능력을 훨씬 꼼꼼히 따져야 할 것이고, 금융당국은 이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길게 보면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 가처분 소득을 올려야 가계부채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해법에 기대기엔 부채의 질이 너무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더 이상 안이하게 대처하면 폭탄 돌리기가 될 뿐이다. 경제 불안의 뇌관을 제거하기 위한 범(汎)정부 차원의 종합적이고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