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전자결제- '스마트 카드' 시장 동향 [2]

중앙일보

입력

흔히들 스마트 카드가 최근에 등장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마트 카드는 사실 PC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마트 카드 기술은 지난 74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특허를 얻었다. 그 뒤 미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스마트 카드 덕에 오프라인으로 물품구매를 확인할 때 드는 엄청난 통신비가 절감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80년대 초반 AT&T 분할 이후 업계 과당경쟁으로 전화요금이 저렴해졌다. 그 결과 소매업계는 마그네틱 카드를 이용한 물품구매에 대해 전화로 확인하는 방법을 계속 고집했다.

미국인들이 스마트 카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현금을 대체할 수 있는 직불카드의 경우 더 심했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비자카드 단독으로 선보였던 스마트 카드는 실패작임이 판명됐다. 이어 98년 맨해튼에서 비자카드·마스터카드가 공동 추진한 스마트 카드 대중화 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99년 9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블루 카드’로 미국에 스마트 카드 붐을 조성하려 든 것은 의외였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美 전역에서 블루 카드를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한편 신규 가입자에게 특별 할인 혜택까지 제공했다. 시장조사기관 브리테인 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예상치의 배나 되는 400만 장의 블루 카드를 발급했다. 발급 대상자의 반은 신규 가입자였다.

스마트 카드치고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블루 카드가 그처럼 순식간에 선풍을 일으켰다는 것은 가위 놀랄 만한 일이다. 16KB 칩 블루 카드는 암호화된 전자지갑 외에 별 기능도 없었다. 실용성보다 미적 측면이 강했다는 말이다.

블루 카드의 성공요인은 디자인이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블루 카드 중앙에 큼직한 홀로그램을 배치, 미래 기술의 신비로움을 한껏 강조했다. 그야말로 멋진 디자인이었다. 유행과 기술에 민감한 이들은 으레 블루 카드를 소지하고 다녔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온라인 구매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을 감안, 칩으로 보안성이 강화됐다고 선전했다. 게다가 스마트 카드 판독기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는 탁월한 마케팅 전략으로 비용면에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브리테인 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블루 카드 소지자 가운데 카드 판독기를 주문한 사람은 8%에 불과했다. 블루 카드가 정작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긴 것은 신용카드업계에서 가장 유리한 가입조건이었다. 신규 카드 발급 후 6개월 동안 이자는커녕 연회비도 낼 필요가 없었다.

스마트 카드 소지자가 수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업계는 또다른 걸림돌에 봉착하게 됐다. 소비자들이 스마트 카드를 어디서 사용할 것인가. 스마트 카드도 전용 판독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매카시의 말마따나 문제는 칩 판독기가 보편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느냐는 점이다. 스마트 카드가 일반 상거래에 통용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하드웨어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

현금자동인출기·주유소·극장·하드웨어 매장·부티크·볼링장·미술관·음료수 자판기·PC 등에 스마트 카드 판독기 수백만 대를 설치해야 한다고 가정할 경우, 기존 신용카드 인프라를 대체하는 데 드는 비용은 11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비자카드의 스마트 카드 담당 수석부사장 다이애나 녹스에 따르면 그 가운데 카드 소지자들이 40억 달러, 업계가 나머지 70억 달러를 부담해야 할 판이다.

소비자들로서는 부가가치도 없는 카드에 40억 달러나 쏟아붓는다는 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슨에 따르면 온라인 소매업계가 스마트 카드 도입에 적극 나서지 않는 한 스마트 카드의 다양한 기능은 사장(死藏)될 수밖에 없다. 온라인 소매업계에서 스마트 카드를 상용화하려면 좋이 2년은 걸릴 것이다. 게다가 월마트 등 오프라인 소매업계가 판매시점관리(POS) 시스템을 스마트 카드와 연계시키려면 최장 10년이 걸릴 수 있다.

스마트 카드가 기존 신용카드에 비해 보안성이 향상됐다는 주장도 사실과 좀 다르다. 온라인 소매업체 가운데 스마트 카드 이용 구매와 기존 카드 이용 구매가 별도로 처리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 중인 곳은 아직 없다. 선전대로라면 스마트 카드는 비밀번호나 개인식별번호(PIN)와 함께 사용하면 카드 소지자의 신원이 확인되는 디지털 인증 기능까지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온라인 구매시 신용카드 번호를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온라인 소매업계는 신용카드 부정사용 방지책으로 구매자에게 신용카드 계좌 정보를 요구한다. 그런 추세는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로버트슨은 “신용카드업계가 스마트 카드의 보안성이 믿을 만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전까지 소매업계로서는 개인 신용정보를 계속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소비자들 사이에 스마트 카드를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참신한 디자인이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프로비디언 은행의 신규 고객 담당 부사장 빌 뷰캐넌은 “스마트 카드를 칩카드로만 선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며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투명 플라스틱으로 제작해 다양한 혜택·마케팅과 연계시킨 것이 소비자에게 먹혀든다”고 분석했다. 로버트슨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고 근사한 요소를 추가할 경우 먹혀들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델라웨어州 윌밍턴에 있는 퍼스트 USA 은행은 투명 플라스틱에 혹할 소비자도 있겠지만 결코 외양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정말 유용한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진짜’ 스마트 카드를 제공 중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스마트뷰(SmartView)다.

스마트뷰에는 신용카드 계좌 정보가 저장된 전자지갑 기능뿐 아니라 인터넷 이용자 ID·비밀번호, 선호하는 웹사이트 목록까지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블루 카드와 마찬가지로 스마트뷰도 전용 판독기가 없을 경우 정보 접근은 불가능하다. 퍼스트 USA는 고객들이 아마존닷컴과 아웃포스트닷컴 (Outpost.com)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구입액의 5%를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캐시백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퍼스트 USA는 인터넷 보안기능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워런은 “칩카드의 생명이 보안에 달려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스마트 카드 예찬론자들은 블루 카드가 성공을 거둔데다 그와 유사한 카드들이 선보이고 있다는 것은 미국 소비자들이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 외국에선 이미 오래 전에 정착된 기술을 받아들일 채비가 돼 있다는 징조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블루 카드를 선호하는 것은 디자인과 낮은 이율 때문이지 결코 첨단기능 때문이 아니다. 신용카드업계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스마트 카드의 참신성이 퇴색한 뒤 기능성으로 승부해야 할 때까지 적어도 1∼2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는 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