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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누가 진보를 지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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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욱
정치부문 차장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이 수록돼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 앞에 나타난 순간을, 선생님은 단편소설에 필요한 ‘경이적인 모멘트’라고 설명했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이제 선거 부정이라는 단편을 넘어 종북(從北)과 비상식으로 주제를 넓혀 가며 중·장편을 향하고 있다. 그들을 알던 사람들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을 뿐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자에겐 예기치 않았던 세 가지 ‘경이적인 모멘트’가 있었다.

 첫 순간은 5월 2일 조준호 4·11총선 비례대표 경선 부정 진상조사위원장이 “이번 경선은 총체적인 부정선거였다”고 고백했을 때였다. 중앙일보를 통해 부정 의혹이 처음으로 세상에 터져나왔을 때만 해도 이런 발표를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그 후 드러난 옛 당권파의 격렬한 저항을 보면, 이는 조준호라는 사람의 양심이 빚어낸 ‘일대 사건’이었다. 머리끄덩이가 잡히고, 전신마비의 위험 속에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물러섬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조준호는 통진당 지도부 중 유일한 고졸 출신 인사였다. 명문대학 출신, 학생회장 출신들이 떵떵거리는 통진당에서 그는 소수자였다.

 두 번째는 5월 4일 윤금순 비례대표 1번 당선인이 맨 먼저 의원직 사퇴를 선언한 순간이었다. 따가운 눈총의 한복판에 있던 이석기 당선인은 버티고 있는데, 그는 “국민께 부끄럽다”며 가진 걸 내려놨다. 윤씨는 농민 출신이었다.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 간부들이 그의 판단을 성원해 줬다. 회견 도중 윤씨의 두 눈에는 회한 많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강기갑 비대위원장의 사퇴 종용에 20분간 울기만 했다는 김재연 의원과는 달랐다.

 세 번째 순간은 5월 16일 통진당 투표에 참여했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노조원들이 “옛 당권파 사람들이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이석기 후보를 찍으라고 했다”고 폭로했을 때였다. 이는 선거 부정을 목격한 사람 중에서 나온 첫 실명(實名) 증언이었다. ‘가장 깨끗해야 하는 진보정치가 시정잡배보다 못한 짓거리’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성명서 끝에는 이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국민의 참담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나’라는 글귀가 가슴에 닿았다.

 돌이켜 보니 지하에서, 머리로 진보를 외치던 사람들이 손에 잡은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할 때 이를 툭 던져버린 것은 고졸 출신 농민·노동자들이었다. 통진당의 오랜 환부를 도려내고 환골탈태의 기회를 마련한 것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도, 선거 컨설팅으로 큰돈을 번 ‘배후의 실력자’도 아닌 바로 이들이었다.

 이정희 전 대표는 최근 “노동자와 농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진보정당”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노동자 조준호와 농민 윤금순의 목소리는 그에게 무엇인가. 이석기 의원은 “내가 무너지면 (진보 진영이) 줄줄이 다 무너진다”고 했다. 과연 진보를 지키는 사람은 이석기인가, 아니면 조준호인가. 훗날 한국 정치에서 진보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 공(功)은 온전히 위기 때 경이적인 모멘트를 만들어 낸 그들의 몫이라고 믿는다. 30일 통진당의 당 대표 경선 결과를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