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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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낯익다 못해 진부할 정도다. 위기가 오히려 정상이 되었다고 할까? 최근 탈법적 예산 전용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이른바 '브레인코리아(BK) 21'이라는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에서도 인문학은 '브레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인문학에 배당된 재원은 전체의 1퍼센트가 채 못된다. 한때 학문의 총아로 불렸던 철학, 역사, 문학의 운명이 어찌 이리도 딱하게 전락했을까?

더구나 문제는 대학의 학과 선택에서도 인문학은 찬밥이라는 점이다. 법대, 경영대를 선호하는 현상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따금 삐딱한 천재나 괴짜들이 철학과의 문을 두드리곤 하던 풍경은 이제 이발소 그림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한다. 인문학은 실용성이 없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안 된다. 또 학문적으로 봐도 통 재미가 없다. 법학과 경영학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데, 인문학은 수백 년 전의 '역사'나 옛 사람들이 고민했던 '철학'을 가지고 노상 지지고 볶아대니 하품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다. 서구에서 오늘날과 같은 금융제도가 자리잡기까지 적어도 700년 동안 겪은 숱한 시행착오를 모르고서 어떻게 근본적인 금융 구조조정을 이룰 수 있을까? 발칸이나 중동 국가들에 파견되는 외교관들은 과연 그 나라들이 겪고 있는 분쟁의 근본 원인이 종교에 있으며, 따라서 수백 수천 년의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문학적 지식'을 알고 있을까?

인문학은 결코 비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게다가 대학에서 배우는 그 어떤 내용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큼' 실용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인문학은 응용 학문을 가능케 해주는 토대의 구실을 한다. 철학을 없고서 법학이 있을 수 없고, 사회학을 도외시한 경영학은 불가능하다. 정작으로 인문학자들이 자성해야 할 내용은 어떻게 하면 인문학의 본래적인 실용성을 회복할 것인가에 있다는 이야기다.

기초 학문과 응용 학문의 괴리는 인문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입시에서 역사와 철학이 겪는 수모(?)는 물리학과 화학도 겪고 있으며, 법학과 경영학이 누리는 영예(?)는 의학과 공학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두 가지 대화 통로의 개설이 필요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 그리고 기초 학문과 응용 학문의 대화.

그렇다면 일찍이 찰스 스노가 1950년대에 고민한 내용을 커닝할 필요가 있겠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이자 과학 행정관이었던 그는 그 세 가지 '신분'을 총동원해서 '두 문화'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문학적 지식인(인문학자)과 과학자의 사이는 몰이해, 때로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지식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차원에서도 별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하나의 사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연구하면서도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스노는 '두 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두 문화 간의 오해와 괴리는 심각하다.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이 선진적인 첨단 문화에 속한다고 믿는다. 반면 인문학자들은 과학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과 지적 생활을 저해하는 반문화적인 것이라고 여긴다(특히 19세기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과학을 오해하는 정도를 넘어 경멸했는데,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뉴턴의 물리학을 맹렬하게 비난한 일은 유명하다).

인문학과 과학 간의 그런 오해는 기초 과학과 응용 과학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과학혁명은 우리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혈액이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은 비과학적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초 과학의 가장 단순한 개념조차 따라가지 못하며, 응용 과학에 대해서는 더 어둡다. 공업적 생산이란 그것을 모르는 이에게는 일종의 종교 요법과 같은 신비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일찍이 뉴턴부터 시작하여 톰슨, 맥스웰, 러더퍼드 등 세계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산업적인 감각을 지니고 거기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예를 들어 러더퍼드(그는 스노의 스승이었다)는 기계 설계도를 가지고 엔지니어들이 설계도에 따라 기계를 실제로 제작한 것을 보고도 감탄할 만큼 공학에 무지했다('공업적 생산은 종교 요법!'). 더구나 기초 과학자들은 응용 과학을 2류 두뇌의 소유자에게나 알맞은 직업이라고 경멸해 왔다.

두 문화가 생겨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갈수록 그 두 문화가 양극 분해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은 뭘까?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스노는 한 가지 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잘못된 교육제도가 두 문화를 낳은 원인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전문화 교육이 원인이다. 학생들은 어린 나이부터 전문화에만 편중된 교육을 받으므로 해당 분야에 관해서는 해박해지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해결책은 무엇보다 균형잡힌 교육이다. 즉 과학도에게는 인문 교육을, 비과학도에게는 과학 교육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태는 곧 위험해질 것이다. 어떤 위험일까?

"의사소통을 할 수도 없고 또 하지도 않으려는 두 문화의 존재는 위험하다. 특히 과학이 우리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즉 우리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결정하는 시대에는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과학자들이 정책 결정자들에게 잘못된 조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정책 결정자들은 그것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차 대전 중 전쟁의 승리를 위해 과학자들을 동원하는 일에 참여했던 스노로서는 일종의 자기고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원자력 에너지를 인류가 최초로 응용한 결과는 바로 원자폭탄이었으니까. 이처럼 과학의 성과는 비과학적 지식인(물론 정치인도 포함된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실 대학입시와 BK 2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문학에서든 과학에서든 기초 학문보다 응용 학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우리나라의 천박한 학문적 풍토에서는, 스노가 지적하는 지나친 전문화보다도 오히려 전문화의 결여가 더 큰 문제점이다. 제대로 된 전문화라면 인접 학문에 대한 필요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마련이다. 전문화와 크로스오버, 이건 두 문화의 대화 통로만 확보된다면 결코 두 마리 토끼가 아니다.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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