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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최후의 날 시계소리 들려” … 마드리드 금융권 ‘탄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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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9일(현지시간)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유럽 문제를 논의 중이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헤르만 반롬푀이 유럽연합정상회의 상임의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위원장. 이 자리에서 유로존 회원국은 유로존 통합과 안정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로스카보스 AP=연합뉴스]

높이 200m가 넘는 초고층 빌딩 4채가 버티고 있는 곳. 스페인 마드리드의 ‘콰트로토레스 비즈니스지역(CTBA)’이다. 라틴(남유럽·남미) 세계의 금융 중심지다. 유동성이 넘쳐흘러 좋았던 시절(2001~2006년) 스페인이 ‘영국 런던 금융중심가 더시티(The City)를 능가하는 유럽의 금융 중심지를 만들겠다’며 개발한 곳이다. 터무니없는 야심은 아니었다. 지중해 지역과 남미 금융의 허브가 바로 마드리드였다. 그 시절 스페인 정부와 금융가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런던 더시티를 능가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시중은행 스트레스테스트(자산 건전성 심사) 발표 하루 전인 20일 오전 콰트로토레스 분위기는 음울해 보였다. 전날 마드리드 공항에서 만난 산탄데르은행 직원은 “최후의 날(Doomsday)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는 또 “파국의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바로 스페인 정부의 구제금융 신청 가능성이다.

 발단은 네덜란드계 금융그룹인 ING 보고서였다. ING는 스페인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시장금리)이 18일 연 7%를 넘어서자 2차 구제금융 가능성을 제기했다. 시중은행이 아니라 스페인 정부가 구제받아야 한다는 예측이었다. ING는 구체적인 액수도 제시했다. 2500억 유로(약 367조5000억원)였다.

 스페인 현지 경제신문인 엘레코노미스타는 “ING 시나리오에 따르면 스페인 정부가 3년간에 걸쳐 2500억 유로를 도움받는다”고 이날 보도했다. 스페인이 받는 구제금융은 시중은행을 살리기 위해 받기로 한 1000억 유로와는 별도의 돈이다. 결국 스페인이 받는 구제금융은 적어도 3500억 유로(약 470조4000억원)가 된다. 시중은행들의 스트레스테스트 결과 시중은행 구제금융이 1500억 유로에 이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총액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스페인이 3500억 유로만 받아도 그리스보다 2.6배 정도 많다. 유럽연합(EU)이 버거워할 수밖에 없다. 임시 구제금융 펀드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잔액은 2510억 유로 정도다. 5000억 유로짜리 상설 구제금융 펀드(ESM)는 올 7월부터 조성되기 시작한다. 독일·프랑스가 하루라도 빨리 행동에 나서야 할 듯하다.

 ING는 유럽중앙은행(ECB)의 개입도 예상했다. “스페인 국채 10년물 시장금리가 연 7.5%를 넘어서면 ECB가 시장에서 스페인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고 했다. ECB가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이탈리아와 그리스 이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동했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최근 석 달 반 정도 사이엔 사들이지 않았다.

 ING만 스페인 앞날을 음울하게 본 것은 아니다. 미국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빌럼 뷔터는 19일 투자자들과 한 전화 콘퍼런스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끝내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EU 등이 “충분한 자금을 갖고 있지 않아 두 나라를 구제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편법이 동원될 수 있다”고 뷔터는 전망했다. 바로 시중은행들을 동원하는 전술이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가 시중은행을 움직여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값(낮은 시장금리)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를 사들이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영국 등이 써먹은 전시 금융동원체제와 비슷하다.

 뷔터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ECB가 직접 나서는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그는 “여차하면 ECB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의 국채를 받아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들인 국채를 떠안아주는 것이다. 1980년 이후 금융시장에 정립됐던 ‘중앙은행 독립’‘자기 책임하의 투자’ 등의 원칙이 위기 앞에 마구 흔들릴 운명인 셈이다.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 경기 침체, 주요 기업 파산 등 위험 상황을 가정하거나 금리나 환율 등이 급격히 출렁거릴 때를 상정해 은행과 증권사 등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작업.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한국 정부가 시중은행 생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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