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의 연작시 '겨울 나그네'

중앙일보

입력

이 형, 올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습니다. 겨우 내내 큰 눈이 내리더니 2월 중순에는 32년만의 폭설이라는 큰 눈이 내리는군요. 그때도 겨울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실었었지요. '군자'역에서 내려 시인 신경림 님의 '군자에서'라는 시를 누가 먼저 외었던가요? 그리고는 무작정 걸었지요.

그때 우리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쯤 지난 뒤, 우리는 서울 시청 앞 아주 작은 레코드점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찾았습니다. 그때도 겨울이었어요. 레코드점에 손님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밀봉된 음반을 뜯어서 그닥 유명하지 않은 러시아 가수가 부르는 노래 몇 소절을 듣고 나와 근처의 대폿집에 들러 지난 시절을 이야기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0년 전 우리가 함께 군자역에 내려 말없이 걷기만 하던 그때 우리의 청춘을 슬프게 했던 많은 사람과 사람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나게 웃어제꼈습니다.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한 마디 하고는 웃고, 또 서로의 한 마디를 듣고 또 웃곤 했지요.

최인호의 소설 '겨울 나그네'도 이야기했어요. 만취한 몸을 질질 끌고 나온 이형은 어느 새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몹시 쓸쓸한 표정을 지었지요. 그때 '군자에 가고 싶어'라던 이형의 목소리가 왜 그리도 쓸쓸하게 들렸던지요. 만취한 이형에게서 나는 어쩌면 겨울 나그네를 떠올렸는 지 모릅니다.

나 세상으로 떠나리
드넓은 세상으로 떠나리,
저 바깥의 숲과 들판이
푸른 빛이 아니라면 좋겠어!

(중략)

아, 초록색, 너 나쁜 색깔아,
왜 나를 줄곧 그렇게 쳐다보니,
뽐내는 짓궂은 눈초리로,
이 가엾은 창백한 남자를?
- 빌헬름 뮐러, '싫어하는 색깔'에서

뮐러의 연작 시 '겨울 나그네'의 한 소절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시를 거칠게 인쇄된 레코드 뒷면에서 읽었습니다. '방랑은 아마 청춘의 특권일 거야'라고 말한 것은 아마 이형이었을 겁니다. 그때 우리가 자주 만나던 린덴바움이라는 까페가 아직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 빌헬름 뮐러, '보리수' 전문

그 시집 '겨울 나그네'(빌헬름 뮐러 지음, 김재혁 옮김, 민음사 펴냄)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국내 초역이라고 하지만, 이미 슈베르트의 음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켓 뒷면이나 음반에 끼여 있는 해설지를 통해 다 알고 있는 연작 시입니다. 역시 슈베르트의 연가곡으로 많이 알려진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함께 두 편의 연작시를 한 권으로 묶어낸 책입니다.

작은 책 한 권을 보며 하나의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뮐러의 이 시들이 독일 문학사의 '대중적 낭만주의'의 대표작으로 이야기되든, 혹은 그냥 대중 가요로 기억되든,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라는 것만이 내게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랑과 죽음의 노래, '겨울 나그네'를 책으로 다시 보는 것은 적지 않은 독서 체험 가운데에서 유난히 행복한 체험입니다.

이형,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엊그제만 해도 하얗게 온 세상을 뒤덮었던 폭설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방랑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번민과 고뇌, 이제는 한 꺼풀 접으셨는지요. 책으로 처음 보는 '겨울 나그네'이건만 옛날 이 시에 나오는 젊은이처럼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봤던, 아주 오래된 책인 것처럼 체온이 느껴집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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