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영화, 내가 맡은 배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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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호 31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딱히 좋아하는 배우는 별로 없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의 험프리 보가트나 ‘대탈주’에서의 스티브 매퀸이 끌리긴 했지만 좋아하는 배우로까지 꼽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국 배우 데보라 커(Deborah Kerr)는 예외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주저 없이 답했던 유일한 배우가 바로 그녀였다. 그러던 그녀가 몇 해 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침 세계은행에 근무할 때였는데 워싱턴포스트지는 그녀의 별명을 따 “영국의 장미(English Rose) 지다”는 부고기사를 실었다.

왜 그렇게 끌렸을까 곰곰이 따져 보니 영화 ‘쿼바디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데보라 커는 주인공 리지아(Lygia) 역으로 나온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네로 황제 시절 인질로 잡혀 온 청순한 기독교도 여인과 로마 장군 간의 사랑과 신앙을 그린 1951년 작품이다. 상대역은 미남배우 로버트 테일러,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동명(同名)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거의 한 면에 걸친 부음기사의 대부분은 그녀의 53년 대표작인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초점을 맞췄다. 하와이 해변가 버트 랭커스터와의 ‘할리우드 최고의 키스신’으로 유명한 영화. 6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데보라 커가 가장 수상에 근접했던 작품이다. 비록 그해 수상의 영광은 ‘로마의 휴일’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오드리 헵번에게 뺏기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도 한 편의 영화고 우리는 그 무대에 출연한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에서 놓치는 그림 같은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생이란 영화’에서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여러 배역을 맡고 살아간다. 화려하고 대단한 역도 많지만 포기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그래서 더 중요한 배역도 있다. 누구의 자식·부모·친구 또는 남편이나 부인 같은 역이다. 소홀히 하기 쉬운 역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우리 인생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만드는 역이 아닐 수 없다. 아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또 가끔은 잊고 사는 고마운 관계까지 생각하면 내 인생에 주어진 어떤 배역도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배우가 주어진 배역에 충실해야 하듯이 우리도 인생에서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 인생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다이내믹하다. 영화 속에서 ‘주어지는’ 배역과 달리 인생에서는 자기 스스로 배역을 ‘만들거나 바꿀’ 수 있다. 자기 인생을 최고의 영화로 만들기 위해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더욱 아름답다. 인생을 보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더 있다. ‘인생이란 영화’에서는 연습이나 재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감독의 ‘컷’ 사인도 없다. 누구나 자기가 만드는 영화에 책임을 지는 시나리오 작가이며 감독이자 주연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영화보다 한층 절실하다.

몇 주 전, 업무차 런던에 갔다가 워털루다리를 건널 기회가 있었다. ‘쿼바디스’가 만들어지기 11년 전, 같은 감독이 만든 ‘애수(哀愁)’의 무대로 유명한 다리다. 다리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인생이란 영화’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지금 어떤 무대에 서 있고 무슨 역을 맡고 있는지. 그 배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어려운 경제상황, 유럽발 재정위기, 심화되는 양극화, 앞으로 힘들게 전개될 정치환경이란 장(場). 그 무대에서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과 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나라살림을 꾸리는 역을 맡았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맡고 있는 배역의 무게가 한층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을 느끼며 새삼 마음가짐을 단단히 다져 봤다.

부고 기사에서는 ‘왕과 나’ ‘흑수선’ 같은 데보라 커의 다른 출연작은 짧게라도 소개한 반면 ‘쿼바디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녀가 나온 다른 영화 중 내가 크게 좋아한 영화가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내가 좋아했던 것은 ‘데보라 커’가 아니라 쿼바디스에서의 ‘리지아’였던 것 같았다. 배우가 아니라 배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사블랑카의 ‘릭’이나 대탈주에서의 ‘캡틴 힐츠’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김동연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으로 금융위기 극복에 기여했고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재정건전화를 주도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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