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성 '와인 원샷'…덩치 큰 서양인도 항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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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신임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오른쪽)은 마케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아 ‘야전형 CEO’로 불린다. 그룹 비서실에 오래 있었던 전임 김순택 실장(부회장·왼쪽)과 대비되는 점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김포공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배웅하고 나오는 김 부회장과 최 부회장. [연합뉴스]

최지성(61) 삼성그룹 신임 미래전략실장은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부사장에 오르자 취임 일성으로 “3년 안에 소니를 잡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소니는 아날로그TV 시절부터 20여 년간 세계 TV시장 1위를 놓지 않은 강자였다. ‘천하의 소니’를 한국의 삼성전자가 넘어서겠다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중국 하이얼이 삼성전자를 잡겠다는 선언만큼이나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하지만 이듬해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2006년 보르도 TV를 내놓았다. 그해 1월 미국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서 보르도TV는 ‘얇고 광택 나는 검정 테두리에 스피커를 본체 뒤로 숨긴 디자인’으로 경쟁업체에 충격을 줬다. 세계 TV업체들이 지금까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디자인이다. 이를 앞세워 삼성은 TV사업을 시작한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했다.

 2007년 정보통신총괄 사장으로 옮긴 그는 “3년 안에 노키아를 넘어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저 ‘잘해 보겠다’는 각오 정도로 받아들였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노키아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이 연간 1억6000만 대의 휴대전화를 팔 때 노키아는 4억3700만 대를 팔고 있었다. 그만큼 버거운 상대였지만 약속을 지키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휴대전화 매출에서 노키아를 넘어선 데 이어 올 1분기에는 전 세계에서 매일 휴대전화를 100만 대 이상 팔며 수량에서도 노키아를 눌렀다. 스마트폰에서도 애플과 1위를 다투고 있다. 세계 전자업계에서 최 부회장을 “세계 1위가 뭔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1977년 삼성에 입사한 최 부회장은 85년 사정이 어려운 삼성전자로 ‘사내 스카우트’돼 구주법인장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됐다. 말만 법인장이지 실제로는 1인 소장이었다. 무역학을 전공한 그는 기술 분야 약점 보완을 위해 영어로 된 두꺼운 반도체 기술서를 통째로 암기했다. 유럽 전화번호부를 놓고 ‘전자’라는 이름만 들어간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무박 2일’ 출장을 다니며 부임 첫해 100만 달러어치를 팔면서 근성과 칼날 같은 일 처리로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주특기는 와인 원샷. 큰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부은 뒤 한 번에 마신다. 오랜 해외 영업 때 써먹던 방법인데, 덩치 큰 서양인들도 두 잔이면 나가떨어졌다고 한다.

최 부회장은 유럽 영업 6년간 매년 매출을 두 배씩 늘린 성과를 인정받아 93년 반도체부문 대우이사로 승진한다. 이 즈음부터 최고경영진의 관심을 받은 업무와 관련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강단으로 ‘최틀러’라는 별명도 얻었다. 정작 본인은 최근 “다 옛날 얘기고 요즘은 부드러운 남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획에서 마케팅까지 두루 겪으면서도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흔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이지만 금융 경험이 없다. 미래전략실장이 삼성 내 모든 계열사 일을 총괄하는 자리인 만큼 향후 보완 과제로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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