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놀이터 자세히 보니 이런 욕설이…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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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다른 놀이터지만 (위는 성남 서현청소년수련관 앞, 아래는 서울 도곡동 한 아파트) 모두 욕설 투성이다. 이곳뿐 아니라 대부분 놀이터가 낙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정봉 기자]

3일 오후 6시 경기도 성남 서현청소년수련관 앞 놀이터의 미끄럼틀은 낙서로 빼곡히 채워졌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봐 초등학생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가 △△를 좋아한대요’ ‘○○○(아이돌 가수)! 사랑해요’라는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 ‘X까’ ‘X발’ 등 욕설이었다. 아들과 함께 놀이터에 나온 김모(39)씨는 “낙서 내용이 어른이 봐도 흠칫 놀랄 정도인데 지우지 않고 두는 게 이상하다”며 “아이들이 하는 낙서겠지만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도곡동의 한 아파트 놀이터도 검은색 매직·사인펜으로 쓴 욕이 놀이기구를 도배하다시피했다. 이곳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10~12살 정도 아이들이 낙서를 하는 것을 몇 번 봤는데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여겨 나무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정재연(12)군은 “처음엔 호기심으로 했다가 어른들이 야단치지 않아 재미 삼아 계속 낙서를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주택가·아파트의 놀이터가 낙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기자가 둘러본 서울시내 9곳의 아파트 중 7곳의 놀이터에서 낙서가 발견됐다. 5곳에선 욕설 낙서가 보였다. 강남·강북 모두 인적이 드문 놀이터일수록 낙서가 심했다. 아파트 보안요원 이모(21)씨는 “대부분의 낙서는 초등학교 3~5학년 또래가 한다”며 “지워도 계속 반복하고, 말리고 싶어도 부모들이 항의할까 봐 못 본 척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 장난으로 놔두기엔 낙서가 갖는 폐해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회규범에 대한 존중감이 형성되는 10대 초반에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야 반사회적 인물로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통상 개인의 범죄적 성향은 12세 무렵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남대 이창무(경찰행정학) 교수는 “어른들은 낙서를 하는 어린이를 꾸짖어 잘못된 행동임을 알려줘야 그 아이가 규범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한림대 조은경(심리학) 교수는 “어렸을 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규범을 학습하는지에 따라 성인이 됐을 때 욕구 조절 능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낙서는 우범적 환경을 불러올 수 있다고 범죄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사소한 잘못을 눈감아주면 더 큰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 적용된다는 의미다. 실제로 성남의 놀이터처럼 낙서가 많은 곳은 청소년 흡연 등 비행 장소로 이용됐다. 형사정책연구원 박경래 박사는 “낙서 등으로 시작한 사소한 무질서가 점점 커지고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형사정책의 상식”이라며 “1994년 미국 뉴욕의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이 지하철·거리 낙서를 단속하면서 시작한 ‘무관용 정책’은 4년 만에 범죄의 75%를 줄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에 대한 규범 교육과 아파트의 관리·감독을 엄격히 하는 것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박 박사는 “지역 주민이 나서 아이를 처음부터 타이르거나 놀이기구 주위에 경고 표지판을 붙여야 한다”며 “표지판이 별 효과 없어 보여도 사람들을 멈칫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서울교대 허종렬(사회교육학) 교수는 “낙서를 하는 아이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억눌린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라며 “우리 초등 교육은 지식 위주라 사회 규범을 수업 시간에 배울 기회가 없는데 미국처럼 구체적 사례 위주의 생활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이들이 낙서 대신 할 수 있는 건전한 놀이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아이들에게 낙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리는 ‘낙서 지우기 캠페인’ 등을 벌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 이론=미국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깨진 유리창과 같은 사소한 피해를 방치하면 치안이 허술하다는 인상을 줘 절도나 폭력 같은 더 큰 강력범죄가 발생한다”고 주장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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