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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시스코까지…IT분야 백전백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홍성원 사장은 80년 신군부의 부름을 받는다. 육사 출신으로 전자공학 박사인 그는 중령으로 예편,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과학기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최연소 비서관이었다.

사람 나이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던가. 시스코 시스템즈 코리아 홍성원 사장.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일곱이다. 말 그대로 이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그 때문일까. 그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하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기다릴 수 있는 여유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만큼 그에게서는 중년의 중후함과 은은한 멋 이외에 인생의 깊이마저 느껴졌다.

#Life 1-경영자

홍성원 대표 약력

  • 45년 3월 20일 서울生·67년 육군사관학교 학사
  • 71년 미 유타대학 전자공학 석사·75년 미 콜로라도대 전자공학 박사
  • 75∼80년 육군사관학교 조교수·80∼89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 89∼93년 ETRI 책임연구원·91∼93년 대전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사무2차장
  • 93∼95년 KAIST 서울분원장·95∼96년 현대전자 통신부문 부사장
  • 96년∼현재 시스코 시스템즈 코리아 사장

  • 홍사장은 벌써 2001년을 절반 가량 보냈다. 시스코의 회계연도는 매년 8월 1일부터 시작되기 때문. 이제 2001년 후반기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지난 해 8월부터 한국지사가 한 단계 승격됐습니다. 한국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셈이죠. 그렇게 되면서 조직도 이제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세일즈 위주에서 인사·경리·마케팅 등 지원조직까지 모두 셋업됐으니까요.”

    시스코 코리아의 올해 중점 사업분야는 무선(wireless)과 광통신 분야. “이제 사무실 내 모든 케이블은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무선 네트워크로 전부 대체되는 것이죠. 이는 결국 움직이는 사무실(mobile office)로 발전할 것입니다. 또 광통신 분야에도 역점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스코에서는 광통신 관련 장비를 전혀 생산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제품을 생산, 이미 미국에서는 이 분야의 시장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사장은 경영에 있어 매니저의 역할을 강조한다.

    “매니저라면 반드시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지원자 역할을 하는 리더십이죠. 솔선수범하고 끌어주며 밀어주는 역할을 매니저가 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저격수형 매니지먼트’라고 표현하는데 말하자면 1대 다자(多者)가 아닌 1대 1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려면 모든 부분에 걸쳐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개인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 이유를 찾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시스코는 한국에 주문형 반도체(ASIC) 개발과 설계를 위한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한다. 여기에 향후 3년간 1천만달러를 투자한다는 게 시스코의 계획. 그러나 홍사장은 예상과 달리 여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척후병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단 지켜보다가 가능성이 크면 투자를 늘려 가겠지만 싹수가 노랗다면 그만두는 것이지요.”

    그는 인터넷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는다. 생활의 모든 것들이 인터넷으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95년부터 현대전자에서 통신부문 부사장직을 맡아왔던 홍사장은 96년 12월 시스코에 합류했다.

    #Life 2-군인

    “고교시절 진짜 공부를 못했습니다. 2학년 1학기까지만 해도 60명 중에서 50등 이상 올라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운동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배구선수 생활을 했을 정도죠. 2학년 2학기부터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성적은 쑥쑥 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의고사가 없었다. 자신의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

    “궁금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일반대학보다 시험을 빨리 치렀습니다. 내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육사 시험을 쳤는데 합격한 거예요.” 육사에서는 전교 5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2년 동안 전방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한 후 69년 9월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 국무성 지원 장학금을 받아 유타대학으로 갔어요. 미사일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려면 제어공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당시 지도교수가 ‘그 분야는 한물 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됐죠. 그때 컴퓨터를 처음 접했습니다.”

    석사학위 취득 후 귀국, 1년여 동안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다시 도미, 콜로라도대학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5년, 그러니까 제가 서른 살 때 박사학위를 딴 것입니다. 귀국해서 역시 육사에서 강의를 했어요. 당시만 해도 컴퓨터 관련 박사가 거의 없었던 때라 타 대학 학생들도 많이 가르쳤죠.”

    #Life 3-공무원

    홍사장은 80년 신군부의 부름을 받는다.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최연소 비서관이었다.

    “과학기술 담당 비서관을 맡았습니다. 각 부처의 과학기술에 대한 모든 업무를 관장했죠.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현재 북한에서 한국형 원자로를 건설하는 한국기술개발도 제가 기획해 설립했고 지로센터와 어음교환소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은행결제원으로 통합한 것도 저였어요.”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반도체 산업 육성과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꼽았다.

    “전자산업을 우리나라 주력산업으로 키울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기에는 구조가 너무 취약했죠. 건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품과 가전, 시스템 분야가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중 부품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도체가 포함돼야 했죠.”

    그래서 청와대와 경제기획원에 반도체 산업육성 전담팀이 꾸려졌다. 하지만 이 두 팀간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홍사장이 주축이 된 청와대 팀에서는 반드시 반도체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경제기획원에서는 투자비용 문제를 내세워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와대 팀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삼성과 현대 등에 자금을 지원, 64KD램을 생산했죠. 그런데 만들자마자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개당 2달러 하던 것이 45센트까지 떨어졌어요. 망하기 일보직전이었죠. 5공화국 입장에서도 큰일이 난 것입니다. 사실 내세울 것이라고는 반도체산업밖에 없었거든요. 나머지는 모두 박대통령 시절부터 시행돼 오던 것들이었으니까요.” 청와대 팀과 경제기획원 팀에 대책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음 날 홍사장은 1페이지짜리 대책을 가지고 대통령과 독대했다.

    “그때에는 일본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격폭락에 따른 손해는 일본 쪽이 훨씬 더 많이 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일본이 이 반도체 전쟁에서 지게 돼 있다고 말했죠. 어차피 64KD램은 실패했으니 포기하고 대신 2백56KD램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홍사장의 의견을 삼성이 받아들여 반도체 분야에 과감히 추가투자를 결정했고 동시에 청와대 측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연구비를 지원, 삼성·현대·LG·아남 등과 함께 4MD램을 공동 개발토록 했다. 89년 4MD램이 시판되면서 대박을 터뜨려 우리나라가 반도체 시장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에 대해서는 홍사장도 할 말이 많다. 모든 정력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 5공 비리에 연루되면서 청문회장에까지 선 것이다.

    #Life 4-연구원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사실 청와대 근무한 10년 동안 딸아이가 제 얼굴을 한 번도 못 볼 정도로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제 황금 같은 10년의 인생을 거기서 보냈는데…‘육사에서 받은 은혜는 이만하면 갚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89년 사표를 내고 ETRI 책임연구원으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다. 대전 엑스포가 유치되면서 홍사장은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로 파견을 간다. 사무 2차장직을 맡아 성공적으로 엑스포 준비를 끝낸 홍사장은 93년 3월부터 2년간 KAIST 서울분원장직을 수행했다.

    #Another Life

    홍사장은 운동을 좋아한다. 시간 나면 스키도 타고 골프도 친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친구도 즐겨 만난다.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미래는 현재에 달려있다’고 믿는 홍사장은 그래서 현재에 더욱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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