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있되 글이 없었던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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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좀 시들해졌지만 얼마 전까지 삼행시라는 형식의 유머가 유행했다. 알다시피 삼행시란 세 글자로 된 표제어(이걸 흔히 '운韻'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이고, 굳이 말하자면 시제詩題라고 해야 할 거다)를 가지고 짧은 글짓기를 하는 놀이인데, 특징은 글의 내용이 원래 표제어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데 있다. 즉 표제어의 '음'만 따가지고 삼행짜리 글을 짓는 게 삼행시의 요체다.

그런 유행을 보고 문자의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여긴다면 비약이겠지만, 적어도 수천 년 동안 문자 문명, 특히 한자 문명의 핵심을 이루어왔던 '뜻'의 중요성이 약화되어가는 하나의 사례라고는 볼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삼행시는 비록 경박스럽기는 하지만, 문자의 뜻을 생명으로 하는 한자 문화권의 우리 사회에서 오랜 전통의 과도한 엄숙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조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한자의 뜻, 즉 훈(訓)에 집착하는 태도는 우리 역사, 특히 상고사를 해석할 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15세기에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말은 있었어도 글이 없어 표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바로 훈민정음의 제작 동기 가운데 첫 번째가 아니었던가?

한글이 없었을 때 우리말을 표기한 문자 체계는 이두였다. 한자의 훈과 무관하게 음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 이두다. 사용이 편리했기에 이두는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시대, 심지어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쨌든 표기상으로는 한자였기 때문에 이두의 해석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답게(?) 이두에는 무지했다. 한 예로, 그가 참고한 기록에는 신라 장수 김유신의 아버지 이름이 '舒玄(서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막상 김유신의 묘비를 보니 그의 아버지 이름은 '逍衍(소연)'이다.

이에 난감했던 김부식은 "이름을 바꾸었는지, 아니면 逍衍은 자였는지도 모르겠다"며 어물쩍 넘어간다. 하지만 서현과 소연은 우리말 발음에서는 거의 비슷하다(고대어에서는 아예 같았을지도 모른다). 한자를 뜻글자로만 보는 김부식의 눈에는 이 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부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아울러 이두문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사람은 일제 강점기 민족사학자인 신채호다. 젊은 시절 기자 생활을 했던 그는 1931년부터 당시에는 민족신문이었던 조선일보의 지면을 빌려 일반 대중을 상대로 우리 역사를 강의하기 시작한다. 결국 5년 뒤 옥중에서 순국한 탓에 완성은 보지 못했지만 해방 이후 그의 글들은 '조선 상고사'라는 단행본으로 빛을 보게 된다(삼국시대까지밖에 진행하지 못했기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역사가가 아니라 언론인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조선 상고사'는 정식 역사서의 구성과 체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그의 역사 서술은 더욱 생동감 있고 흥미롭다. 우선 그는 앞부분에 서술한 총론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제시한 다음에 역사 서술에 들어가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모든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전개된다. 아는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이고 비아는 그밖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나라, 민족, 계급 등은 모두 아가 될 수 있다. 이건 민족사관의 입장이다.

여기에다 그는 한 가지를 덧붙이는데, 그것은 바로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관이다. 그래서 그의 역사학은 최초의 민중사학으로 평가된다. 신채호가 이렇게 민중 중심의 사관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역사학계를 풍미하던 실증주의 역사학에 의식적으로 대립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주도한 실증주의 역사학에서는 사대주의와 패배주의 사관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상고사'의 참된 재미와 가치는, 지금은 다소 도식적이고 낡은 듯 보이는 민족사학과 민중사학이라는 점에 있지 않다. 이 책은 단순히 식민지 민중의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취지를 넘어서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에도 중요한 문제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독창적인 이두의 해석이 그렇다.

신채호는 이미 고조선 시대에도 이두가 널리 쓰였다고 말한다. 예컨대 단군왕검의 '왕검(王儉)'은 '임금'의 음역이며, '낙랑(樂浪)'이나 '평양(平壤)'은 한자의 뜻과 무관하게 벌판이나 들판을 가리키는 '펴라'라는 고대 우리말의 음역이었다는 것이다(평양은 옛날에 유경柳京이라 불렸는데, 여기서 柳, 즉 버드나무는 바로 '벌들'에서 'ㄹ'이 탈락된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유명사로 알고 있던 왕검이라는 인명이나 낙랑, 평양이라는 지명은 모두 보통명사였다는 말이 된다.

660년 백제가 당나라 군에 멸망할 때 왜군이 백제를 도우러 온 일이 있었다. 왜군과 당군이 한바탕 해전을 벌인 곳은 지금의 금강 하구였다. 그런데 이곳의 지명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백강으로, '니혼쇼기(日本書紀)'에는 백촌강(白村江)으로 각기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이 점에 관해 신채호는 상당히 재치있게 추리한다.

백강은 흔히 백마강(白馬江)이라고도 부른다. '馬'의 뜻은 말이다. 그렇다면 백마강은 백말강이 된다. 흰 말이 뛰놀던 곳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 천만의 말씀이다. 강물에서 말이 뛰어놀다니! '말'은 달리는 말이라는 뜻도 있지만, 옛말에 말 또는 몰이라고 해서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지금도 시골에서는 윗말 아랫말이라는 말을 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주인공 길산은 재인말, 곧 광대 마을 사람이었다). 일본어에서 '村'은 '무라'라고 읽는다. 말, 몰, 무라는 필경 같은 어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강-백마강-백촌강은 모두 같은 지명이 달리 표기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역사가 그렇지만 고대사의 경우에는 마땅한 사료가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적 추리력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 점이 바로 고대사 연구의 매력이기도 하다. 역사가 남긴 흔적을 단서로 삼아 추리를 통해 온전한 제 모습을 복원해 내는 작업은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연구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조선시대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지금, 신채호와 같은 기백 있는 고대사 연구자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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