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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무에게도 동정 못 받는 최하층 마이너리티 흡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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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천지 어디에 하소연할 데조차 없는 소수자, 천대받는 마이너리티. 바로 흡연자다. 취업이주민·성(性)소수자 등 다른 마이너리티에게는 어느 정도 관심과 배려가 가지만 흡연자들은 아얏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어제가 금연의 날이었다. 오늘부터 서울 시내 공원·광장·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다간 최고 10만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양천구는 담배꽁초 함부로 버리는 사람을 신고하는 앱까지 개발했다. 서울시는 2014년까지 모든 음식점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할 방침이라고 한다. 어디 서울뿐인가. 길거리 금연 조례를 만든 지자체가 전국 85곳에 이른다.

 돌이켜보면 흡연자에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정조 임금이 “우리 강토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혜택을 함께 하고 효과를 확산시켜 천지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보답하려 한다”고 선언한 물건이 바로 담배였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내버스에서 담배를 피웠다. 정부(교통부)가 시외·고속버스에 흡연석을 따로 지정해 골초들을 차 뒤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한 게 1980년이었다. 그 시절 대학가에선 여학생의 공개적인 흡연이 남녀평등의 상징이자 과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2004년 금연하면서 자신의 27년 흡연사(史)를 『흡연여성 잔혹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대학 시절 시국사범으로 끌려가 취조 받다 담뱃갑이 나오자 ‘담배나 피우는 갈보 같은 년들’이라던 경찰이 남학생들에게는 담배를 권하는 모습을 보면서 담배가 남자와 여자에게 얼마나 다르게 작용하는지 깨달았다”는 회고도 담겨 있다. 요즘의 거센 혐연(嫌煙) 열풍에 대해 서 이사장은 “여자들이 그나마 눈치 덜 보고 담배 피울 사회적 분위기가 되자마자 남녀 모든 흡연자가 한꺼번에 공공의 적이 돼버린 셈”이라며 웃었다.

 아파트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담배 한 대라도 피웠다간 이웃의 가차없는 항의를 받는다. ‘동정 받지 못하는 소수자’ 신세는 외국도 마찬가지다. 담배에 그토록 관대하던 일본도 주요 도시 큰길은 금연이다. 1994년 1월 지바현 후나바시역 구내에서 3세 여자어린이가 행인의 담뱃불에 눈을 맞아 실명할 뻔했던 사건이 큰 계기로 작용했다. 이면도로를 한참 헤매야 유리상자 같은 흡연실을 만날 수 있다. ‘너구리굴’에 들어가 한 대 피울라치면 ‘당신이 손에 든 담배 높이는 우리 아이들의 눈높이’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 포스터들이 째려본다.

 깊은 밤 아파트를 내려와 마당에서 담배를 꺼내 무노라면 저만치 이웃 동 앞에 나와 똑같은 처지의, 아주 죄송하고 조심스럽게 깜빡이는 담뱃불을 발견한다. 일종의 동지의식. 이래서 요새는 학연·지연·혈연보다 ‘흡연(吸緣)’이라고 했던가. 그나저나 끊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한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 걱정이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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