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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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34면

나는 어둡다. 표정도 어둡고 옷 색깔도 어둡고 말과 행동도 어둡다. 숫자에도 어둡고 공부에도 어둡고 돈 버는 일에도 어둡다. 요즘은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둡다. 한마디로 어두운 저녁 같은 사람이다. 이처럼 총체적으로 어두운 사람에게도 밝은 것이 하나 있으니, 인사성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학부모 면담을 하던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내 부모에게 인사말로라도 뭔가 하나는 내 칭찬을 해야겠는데 도무지 칭찬할 거리를 찾지 못해 한참을 쩔쩔매다가 외친 ‘유레카’가 바로 인사성이었다. “어머님, 그래도 상득이가 인사성 하나는 참 밝죠. 다만….” 다만 입시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인사성이었지만 그때도 밝았고 지금도 제법 밝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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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화성에 있는 수원예비군교장에서 일병으로 군생활을 하고 있다. 입대하기 전 몇 개월 동안 둘째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덕분에 한동안 녀석과 나는 출근을 함께한 적이 많았다. 그렇게 함께 출근하다 보면 아무리 대화가 없는 부자지간이라도 꽤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는 집을 나서면서부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이어폰이 있다. 이어폰을 사이에 두고 아들 쪽으로는 음악이 흐르고 아버지 쪽으로는 침묵이 흐른다.

강남대로의 중앙차로에 있는 신논현역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사무실이 있는 강남역 11번 출구까지 걸을 때도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나는 마주 오는 청년과 아는 체하며 인사를 나눈다. 내 조금 뒤에서 비둘기처럼 고개를 쭉쭉 빼며 리듬에 맞춰 걸어오던 둘째가 이어폰을 빼고 내게 묻는다. “누구세요?” 자주 가는 커피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알려준다. 둘째는 신기한 모양이다.

몇 발짝 못 가서 또 나는 마주 오는 젊은 여자와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여자는 몇 마디 안부를 묻고 지나간다. 둘째는 이번에도 신기한 모양이다. “누구세요?” 나는 살짝 자랑처럼 말한다. “여기 앞에 있는 병원의 간호사인데 아빠가 가끔 가니까.”
이번에는 멋진 노신사 한 분을 만난다. 인사성 밝은 나는 당연히 인사를 나눈다. 둘째는 또 궁금하다. “누구세요?” “아빠 다니는 회사 건물 경비하는 분. 야근 마치고 퇴근하시는 건가 봐. 저분은 반장님인데 대학 교무처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경비 일을 하시는 거지. 참, 저분 아티스트시다. 우리 가요 작사도 많이 하셨대.” 둘째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거의 회사 건물 앞에 다 와 나는 마이클을 만난다. 마이클은 와인바 ‘사이드웨이’에서 알게 된 외국인이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가 알게 된 사이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었다. 마이클은 자전거를 멈추고 잠시 나와 인사를 나눈다. 나도 인사한다. 짧은 영어지만 인사성 하나는 밝으니까. 국제적인 아빠의 아침 인사 퍼레이드에 아들은 놀란 것 같다. “누구세요?” 글쎄, 마이클을 어떻게 소개해야 좋을까? 와인바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하면 실망하겠지? 그렇다고 업무상 아는 사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내가 “이름은 마이클인데…”라며 우물쭈물하는데 둘째가 하는 말이 이랬다.
“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아빠 말이에요. 누구세요, 아빠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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