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우린 옳은 얘기만 하며 살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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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 인기 사이트로 떠오른 블로그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는 연애 실패담을 공유하는 스터디 공간을 표방한다. 며칠 전 우연히 들어갔다가 다채로운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운영자 ‘홀리겠슈’는 안내문 ‘댓글의 모든 것’에서 블로그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의 공간은 ‘옳은 이야기’를 쓰고 그에 대한 ‘옳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곳이 아니에요.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어른들이 매너 있게 대화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못 생긴 여자한테 안 끌린다’는 남자 말에 ‘그래도 내면을 봐야죠’ 같은 지적을 하거나 ‘키 작은 남자는 남자로 안 느껴진다’는 사람한테 훈계를 하려 들지 말라는 얘기다. 대신 ‘그런 사람도 있구나’ ‘내가 만날 사람이 저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 간·계층 간 소통 부재도 이른바 ‘옳은 이야기’와 관련돼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검증되지도 않은 통념에 따라 옳은 말, 맞는 말, 당연한 말만 하려는 건 아닐까. 정작 할 얘기, 하고 싶은 얘기는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TV 토론을 보자. 출연자가 남녀, 노소, 지역, 일본·미국, 보수·진보에 관해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망언 내지 실언 파문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용기와 전투력 없이는 토론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수 조영남씨는 2005년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란 책을 냈다 진짜로 맞아서 돌아가실 뻔했다. “극일을 위해 일본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는 취지였지만 여론의 뭇매를 피하지 못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훨씬 도발적이고 퇴폐적이다. 요리와 여자 얘기를 엮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나는 유럽에서 인생 최고의 낭비를 즐겼다”고 자랑한다. 그의 주장인 즉 “더 벌자, 더 저축하자는 서글픈 농경민적 가치관이 거품경제와 디플레이션을 일으킨다. 낭비는 미덕이다”는 것이다. 국내 작가가 이런 주장을 펴다간 몇 달은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사회적 발언과 그 표현에 문제점이 있다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문제 제기까지 “그러니까 이러자는 얘기 아니냐”고 포장지를 덧씌우려 해선 곤란하다. 개개인의 취향을 드러내야 할 SNS 공간도 옳고 그름의 무시무시한 심판대가 되곤 한다. 한 대학 교수는 “트위터가 사실상 언론 매체의 기능을 하고 있는 만큼 언론 중재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 아니겠느냐”고 말한 적 있다. 그에게 논문을 써보시라고 했더니 “트위터 사용자들에게 신상털이 당할 것”이라며 극도의 공포감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자들은 “민감한 현실을 말하지 말라. 차라리 이상과 원칙에 대해 말하라”고 조언하는 것인가. 개인에겐 소중한 삶의 노하우이겠으나 사회적으로도 생산적인지 의문이다.

 앞으로는 다양성이 나라의 경쟁력이라고들 한다. 취향이 아이폰을 만들고 문화와 기술을 선도한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성장하려면 막말이 아닌 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고드윈의 법칙(Godwin’s law)’이 필요해지고 있다. 미국 법률가 마이크 고드윈이 창안한 이 법칙은 온라인 토론이 길어질수록 상대방을 ‘히틀러’나 ‘나치’에 비교하는 말이 등장할 확률이 100%에 가까워지는 현상을 이른다. 유럽의 경우 인터넷 기사 댓글란에서 논쟁이 과열되면 누군가 이 법칙을 들어 경고를 한다고 한다.

 한국 식으로 말하자면 ‘빨갱이’ ‘수구꼴통’ ‘독재자’ ‘친일파’ 같은 단어가 나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지불식간에 모두의 입에 채워진 재갈을 느슨하게 풀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같은 곳만 맴돌고 있을 것이다. 신선하지도 않고 별 재미도 없는 ‘옳은 이야기’ 주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