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현금없으면 죽는다

중앙일보

입력

비장한 각오로 새해를 맞이하고….” “위기는 곧 기회다. 현금위주의 내실경영을 하되 핵심사업에는 과감하게 투자한다.”

올 재계 3大 키워드는 ‘위기 극복’… 2001년 신년 벽두 재계 총수들의 생존전략

신사(辛巳)
년 새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신년사는 비장하다 못해 처절하다. 지난 2일과 3일 각 기업들의 시무식에서 낭독된 재계 최고경영자들의 신년사는 ‘공격 경영’ ‘신사업 분야로 진출 확대’ 등과 같은 다분히 확대 지향적이었던 예년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새해에 대한 기대감과 덕담은 신년사의 맨 뒷 줄로 밀려난 것도 신년을 맞는 우리 기업들의 모습이다.

기업들의 신년사의 내용에 공통점이 많다는 점도 또 한 가지 특징으로 꼽힌다. 한 해를 이끌어갈 경영방침을 담은 신년사는 각 기업의 색깔 만큼이나 다양해야 하지만 올 신년사의 내용은 한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공통언어는 ‘위기 극복’이다.

이 같은 현상은 최고경영자들의 우리경제 현실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일치한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구조조정을 마무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고….”(이건희 삼성회장)

“밖으로는 세계경기가 둔화되고 안으로는 내수침체와 금융경색이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우려되는….”(구본무 LG회장)

최고경영자들의 이런 인식은 긴 불황의 터널로 진입하고 있는 새해 우리 경제 환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아래서 기업들은 위기의 재연이냐 극복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최고경영자들의 신년사가 ‘비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LG 등 27개 국내 대기업들의 CEO들이 내놓은 올 신년사의 공통된 화두는 ▶현금중시의 내실경영 ▶경쟁력 확보 ▶경영 및 사업구조 재편 ▶정도경영 등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화두는 ‘현금중시의 경영’. 여기에는 LG그룹을 비롯해 삼성, 한화, 두산, 코오롱, 동양, 현대자동차, 한진해운, 대우자동차 등 절대 다수인 20개사가 내실경영을 첫번째 항목으로 꼽았다.

불황의 시대에서는 성장 위주의 공격 경영보다는 살아남기가 더욱 중요한 과제임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언젠가 우리가 뜻한 바를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는 현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현금창출’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금 유동성 확보는 지난해에도 등장했던 키워드다. 무리하지 않는 투자와 매출전략으로 수익성 중심의 안정적인 성장을 추진하겠다는 전략. 이는 곧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불황기에 대응해 그만큼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코오롱의 이웅열 회장은 “현재는 수익성이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한 사업, 현재도 어렵고 미래도 전망이 없는 부문은 과감히 축출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경영을 실천하면서 중단없는 견실경영을 유지해 한계상황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말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두번째 화두는 ‘경쟁력 확보’.

삼성, 효성을 비롯해 대우전자, 대한항공, 한진중공업 등 9개 기업의 신년사에서 발견된 항목이다. 불황 아래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는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첫번째 무기는 경쟁력이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세계 어느 시장에서나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는 일이다. 조석래 효성 회장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며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품질을 갖춘 초일류 기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번째 키워드는 경영 및 사업구조 재편으로 요약된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21세기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영시스템이 필요하다. 선별과 육성을 통해 핵심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산, 코오롱과 포철, 삼양사, SK글로벌, 현대건설 등의 최고경영자들은 새로운 경영방식 및 사업구조 재편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올해도 재계에는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여전히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변화와 개혁의 주창은 새로운 수익구조 창출이 시급한 종합상사와 만성적인 공급과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섬유업계 CEO들의 신년사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났다.

변화의 필요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그동안 시대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던 철강업계도 조직개편 등을 통해 변신을 선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는 정도(투명)
경영. 이 단어는 롯데, 코오롱, 효성, 동양과 포철, 현대건설, 대한항공, 현대상선, 대우자동차 등의 신년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투명하고 책임있는 경영을 통해 시장의 신뢰를 높이는데 역점을 두어 경영안정을 꾀하겠다는 것. 유상부 포철 회장은 “정도·투명·책임경영은 시장경제의 원리이자 우리 회사의 기본 경영원칙이다. 모든 역량을 고객지키기에 집중하자”고 역설했다.

롯데그룹은 ‘신용·정직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을 새해 경영의 핵심으로 정했다. 신동빈 부회장은 “윤리의식의 변화와 개혁 없이는 21세기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은 “투명·책임경영으로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며 시장의 신뢰를 강화하는데 역점을 둘 것임을 밝혔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포철이 고객중심의 경영을 선언한 것은 이 키워드가 올해 재계 전체의 화두로 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올 신년사에 나타난 주요 대기업들의 경영전략은 업종별로도 두드러진 차이를 나타냈다. 섬유, 건설 등 극심한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업종과 조선, 해운 등 어려운 가운데서도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업종 등 시장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업계의 경우 그동안의 성과를 발판으로 디지털 분야에서 일류기업으로 도약하자고 외치고 있다. 삼성전자는 ‘디지털 e-컴퍼니’를 선언하고 나섰고, LG전자는 ‘디지털 리더기업’을 핵심모토로 정했다.

자동차업계는 내년에 경기위축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듯 수익중시와 수출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수출확대에 총력전을 다해 지난해 사상 최대의 이익을 거둔 기조를 올해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는 대우차는 강력한 구조조정, 생존역량 확보 등 생존전략이 급선무라고 보고 있다.

철강은 기업별로 다소 차이가 난다. 포철은 철강사업 역량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우량기업으로의 도약이라는 큰 그림을 강조한데 비해 다른 업체들은 수익성을 중시하는 전략을 내세워 대조를 이루었다.

종합상사들은 수익구조 개선을 강조했다. 계열사 대행 수출 수수료에만 의지할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이 담겨 있다. 조선업계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 유지에 초점을 맞춘 가운데 수익성 극대화에 적극 나서자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기업들이 신년사에서 다소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비해 두산과 삼성전기는 구체적인 사업 추진방안을 담고 있어 주목을 끈다.

두산 박용오 회장은 지난해 인수한 한국중공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주요 사업과제로 제시했다.

박회장은 “한중의 핵심사업인 발전사업에 집중 투자하는 한편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담수설비 부문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한중은 영업이익률을 현재의 5% 수준에서 2년 안에 10%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그동안 구조조정을 통해 이룩한 현금흐름 중심의 경영, 성과에 바탕을 둔 평가보상 시스템을 접목시키며, 세계적 기업인 GE·웨스팅하우스·알스톰 등과 전략적인 제휴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삼성전기는 전자제품의 디지털화와 다양한 기능 수행에 따른 추가부품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2001년에 4천8백억원의 신규투자로 설비증설과 연구개발에 주력하기로 했다. 특히 수익구조가 좋은 칩부품과 함께 무선 네트워크 혁명이라는 블루투스 관련부품의 개발 및 양산을 앞당겨 주력사업으로 성장시키며, 현재 진행중인 무선랜 장비사업을 확대해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 떠오른다는 구상을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

한편 올 신년사는 기업의 규모별로도 차이를 나타냈다. 4대 기업을 비롯한 대형기업들은 각자가 처한 경영여건에 따라 공격경영과 내실경영으로 대조적인 전략을 표방하고 있다. 반면 한화, 두산 등 중견그룹들은 사업재편에 무게를 둬 미래 생존전략 마련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화, 두산, 동양, 효성, 코오롱 등 중견그룹들의 화두는 사업재편과 유동성 확보.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두산과 금융업 확장을 모색중인 한화 및 코오롱, 동양, 효성 등은 사업구조의 재편에 무게를 싣고 있다. 특히 두산은 한국중공업을 성공적으로 경영, 도약의 기반을 갖추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들 외에 포항제철과 SK그룹 등은 경기부진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어 관심을 모았다. 또 주요 기업들이 올해 강화하거나 신규진출을 꾀하는 분야는 정보통신, 생명공학, 레저, IT 등 첨단, 신규 유망사업 쪽에 몰려 있다.

불황과 구조조정의 험난한 파도에 맞서 치열하게 전개될 올해 우리 기업들의 살아남기에 관심이 모아진다.

민병호 ebnews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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