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71세 소설가 데뷔 이한준씨가 남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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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강현
문화부문 기자

문학담당 기자에겐 일주일에 평균 20권이 넘는 책이 온다. 취재 일정에 쫓기다 보면 그 많은 책을 죄다 읽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몇몇 기준을 세워 책을 선별하곤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문장이다. 제 아무리 소재와 주제가 매끈해도 거친 문장으로 덜컥대는 문학 작품을 계속 읽기란 힘들다.

둘째는 시의성이다. 그 문학 작품이 지금 시대와 긴밀하게 호흡하느냐 역시 책을 고르는 중요한 잣대다.

 ‘초보 작가’ 이한준(71)씨의 10권짜리 대하소설 『피안에 지다』(시우출판)를 집어 든 건 우선 시의성 때문이었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종북주의’니 ‘NL(민족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요즘이다.

 이 소설은 분단이 몰고 온 한 가족의 몰락사다. 가족이 남북으로 흩어지고, 분단 정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 이철준이 주인공이다. 철준은 아버지가 인민군에 처형당하고, 그 자신도 훗날 북에서 기독교 선교를 하다 처형되는 운명을 겪는다. 작가는 남과 북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데, 문득 종북주의에 물든 몇몇 인사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말하자면 이철준은 이한준이었다. 그래서 더 뭉클하다. 작가는 분단 문제에서 비롯된 자신의 굴곡진 삶을 되돌아보고자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씨는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철도국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실직했다. 이를테면 좌우 이념의 문제는 그의 청소년기를 몰락시켰다. 그는 ‘경기중-경기고’ 출신으로 62년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가난 탓에 공부를 접어야 했다. 이후 경제기획원 공무원 등으로 일하며 기반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사업에 손을 대는 바람에 곡절을 겪었다. 이후 그는 인생을 확 틀었다. 55세이던 96년 법무사가 됐다. 2004년에는 서울대에 재입학해 46년 만인 2008년 졸업장을 땄다.

 그는 2003년부터 9년간 소설에만 매달렸다. “소설을 통해 순탄치 않았던 삶을 정리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굴곡의 삶은 상당 부분 이념 문제에서 비롯됐다.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렸으므로, 아들인 그가 고초를 겪었다.

 좌든 우든 경도된 이념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해 온 원흉이다.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은 좌우상잔(左右相殘)의 비극이기도 했다. 그 비극을 종식시키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철준은 피안(彼岸)으로서의 평화를 꿈꾸며 북에서 순교한다. 낡은 이념 투쟁으로 21세기판 민족상잔을 벌이고 있는 일부 정치 세력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