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메츠를 바꾼 사나이, 톰 세이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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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는 신생팀 시절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구단에 지나지 않았다.하지만 톰 세이버라는 대투수의 출현은 이런 메츠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톰 세이버는 거의 혼자서 뉴욕 메츠를 웃음거리에서 챔피언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이버가 메츠에 입단한 이후 메츠의 모습이 달라지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메츠는 그들의 첫 4시즌동안 승률이 .294에 지나지 않았지만 4년 뒤 세이버 덕분에 100승을 올릴 수 있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브레이브스에게서 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월드시리즈에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단 5경기만에 무너뜨리며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는 급성장을 보였다.

세이버가 메츠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후 10년이 지난 뒤 그는 다승(198), 완봉승(44) ,탈삼진(2541) 부문에서 메츠의 최고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세이버는 통산 311승을 거두었으며 이 기록은 역대 16위에 해당되는 대기록이다. 당시 뉴욕 메츠의 전력을 감안한다면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세이버는 사이영상을 세 번 수상했으며, 9년 연속(1968년~1976년) 2백개 이상의 탈삼진을 거두었다.

윌리엄 에커트 커니셔너에 의하면 그는 야구협회의 규칙을 어긴 애틀랜타와 계약함으로써 브레이브스 선수로서 자신의 야구 인생을 거의 시작할 뻔 했었다. 인디언스, 필리스, 메츠 등 세 구단이 그와 계약하기를 원했었는데, 1966년 4월 3일 에커트 커미셔너는 마음대로 메츠의 이름을 뽑아내었고, 메츠는 5만달러의 보너스에 세이버와 계약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급성장을 보이던 세이버는 16개월 후 자신의 생애 통산 8번의 올스타전 출장 중에서 첫번째 올스타전 출장이라는 기회를 얻었고,그 해의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오르며 시즌을 끝마쳤다.

세이버는 그의 첫 메이저리그 두 시즌에 모두 16승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고,1969년에는 25승 7패를 기록하며 메츠를 월드시리즈로 이끌기도 했다.월드시리즈에서 메츠는 5경기만에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물리쳤고, 세이버는 4차전에 등판, 연장 10회 끝에 2-1의 승리를 얻어 내었다.

1970년 4월 22일, 세이버는 셰이 스타디움에서 자신의 첫 사이영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이 날 세이버는 한 경기에서 연속타자 탈삼진 기록을 세우며 환호를 받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세이버는 모두 1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파드리스의 마지막 10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세이버는 1971년, 1972년, 1975년, 그리고 1977년에 20승 이상을 거두며 확실한 에이스로서 발돋움하였지만,1977년 갑작스런 신시내티 레즈로의 트레이드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는 197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무안타로 잠재웠으며,1981년에는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승률인 14승 2패를 거두었다.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세이버에게 갑작스런 부상이 찾아왔고,그 부상은 1982년 그를 5승 13패 방어율 5.50이라는 최악의 시즌을 맞게 했다.

그는 메츠로 돌아온 1983년 약간의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화이트 삭스로 이적한 후 다시 그에겐 화려함이 찾아왔다. 39세인 세이버는 부상에서 회복하며 다승(15승)와 완봉승(4승) 부문에서 화이트 삭스 선수 중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세이버는 결코 그 부활의 순환고리를 놓치지 않았다. 1985년에는 세이버는 심지어 더욱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고, 이 해에 16승을 기록함으로써 마침대 300승 투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통산 61번의 완봉승(역대 7위)이라는 위업을 이룩한 뒤 1986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결심하였다. 세이버가 기록한 탈삼진은 역대 4위에 해당되는 대기록이었고, 또한 세이버는 2.85라는 훌륭한 방어율 기록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세이버는 199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됨으로써 야구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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