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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글이었다, 대형차와 검정 아우디가 포효하는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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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10면

1 중국은 보행자들에게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다. 잘못 걷다간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신세가 된다. 푸른 신호등이 켜져도 섣불리 발걸음을 내디뎌선 안 된다. 2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훙커우 공원은 루쉰 공원으로 개명됐다. 공원 내 루쉰묘 뒤에는 윤 의사의 호를 딴 매헌 공원이 있다.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한국도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는 아니어서 서울시내 주행에 익숙한 내가 동요하기는 쉽지 않은데 상하이(上海)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공항 내부 도로를 빠져나와 훙차오(虹橋)로 접어드는 첫 교차로에서 나는 선뜻 페달을 밟지 못했다. 버스·승용차·삼륜차·오토바이·자전거·리어카·보행자가 엉켜 세찬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③ 상하이 시내로

높이 468m의 TV 송신탑이 있는 둥팡밍주(東方明珠)에서 내려보거나 와이탄(外灘) 일대를 촬영한 원경 속의 상하이와, 지면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몰면서 전후좌우로 보는 상하이는 다른 세계다. 원경을 줌인해 현미경으로 보듯 상하이의 교통을 해부해 보면 주행 방법에는 정주행 외에 좌측으로의 추월, 급정거, 예측출발과 부정출발, 인도 침범, 무단정차, 오른쪽 가장자리 차로에서 좌회전, 그리고 역주행이 포함된다. 사람을 치거나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모든 행위가 관습적으로 벌어진다.
이러다 공항 내부 도로까지만 중국여행을 하고 귀국하는 것 아닌지 실소가 나왔다. 저 혼란의 도가니에 뛰어들어 보자.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뭐.

사람 치지 않는 한 뭐든 된다, 역주행까지
상하이는 모르겠는데 1970년대 말까지 베이징(北京)에서는 야간에도 전조등 사용이 금지됐다고 한다. 중국에 관한 빼어난 책들을 연달아 쓴 피터 헤슬러(Peter Hessler)의 컨트리 드라이빙(Country Driving)에 따르면 83년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시장이 맨해튼을 방문, 밤에 전조등을 켜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전조등 사용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우천 시나 안개가 끼었을 때, 석양 무렵에도 전조등을 잘 안 켜고 다닌다. 중국이 자동차, 마천루 빌딩 같은 하드웨어는 수입했지만 하드웨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를 따라오려면 멀었다는 뉘앙스가 읽힌다. 하지만 전조등을 켜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더 안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계제는 아니다. 인민광장 근처 호텔까지 가는 도중 몇 번이나 사고 위험을 겪었는지 모른다. 인도변에 있다가 푸른 신호등이 켜져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찰나 차도와 인도 사이에 난 자전거도로로 조금 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일군의 오토바이와 전기자전거·자전거들이 쏜살같이 나타났다. 그 무리에 깔려 버리기 직전 핸들을 틀고 급제동했다. 이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빠져나갔다. 무섭다. 중국의 논밭을 습격하는 메뚜기 떼와 같다. 분명 푸른 신호등이었는데….

오토바이족들이 입는 우의를 구입해 어떤 기후에도 끄떡없는 전천후 라이더가 됐다.

상하이에서의 푸른 신호등은 가도 된다는 신호가 아니다. ‘한 번 가 보는 게 어때?’ 아니면 ‘가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해’ 하는 정도의 제안일 뿐이다. 그 제안의 수용 여부는 건너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약 중국인이 법을 잘 지켰다면 농민반란이나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민족의 침입만 없었다면 지금도 하(夏)나라 시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같은 영토에서 같은 문화권을 유지해 온 가장 오래된 나라다. 다만 왕조가 계속 바뀌고 새로 생겼는데 대부분 학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의 반란이 원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농민의 궐기로 가능한 것이었다. 법대로 하면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법은 왕조와 부패한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 평소에 무력한 농민들이 일순간 함께 일어나면 왕조가 바뀌었다.

길도 그렇게 건너는 것이다. 신호등이 켜졌다고 해서 건너는 게 아니라 주위를 살펴봐야 한다. 주동자가 먼저 길을 건너는 시늉을 하며 신경전을 벌여 본다. ‘간을 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는 기미를 보이면(다시 말해 약점을 보이면) 발걸음을 천천히 떼면서 보행자들을 견인한다. 주위 사람들이 동조하면 순간적으로 무리가 형성된다. 그 무리에 끼면 설혹 빨간 신호등이라고 해도 건널 수 있다. 그 대세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혁명에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농민반란의 수많은 주모자처럼 대세를 형성하기 전에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자전거에 의해 고립돼 버린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다. ‘중국 생존 가이드(China Survival Guide)’라는 영어판 관광안내서에 따르면 “중국의 도시에서 걷는다는 건 매 순간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길을 걷는 행위는 독수리의 눈매와 사자의 민첩성, 여우의 교활함, 그리고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법은 현실을 못 따라갈 때가 많지만 근본 취지는 무법천지를 막아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경우 가장 피해 보는 사람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법이 있어 지켜주기 때문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질서가 무너져도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상하이에서 교통법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가장 피해 보는 사람도 보행자다. 그들에게 길의 권리는 없다.

모두 알아서 조심 교통사고 되레 적은 편
도시의 정글에서 사자나 호랑이는 화물차나 버스처럼 대형차들이다. 그리고 관리들이 많이 타는 아우디 검정 승용차. 그들은 경적의 데시벨로 권력을 표시한다. 유리창이라는 방음벽 없이 차도로 가는 자전거에는 바로 귀에 대고 경적을 울리는 것 같다. 꼭 필요할 때 경적을 울리는 게 아니라 경적을 누르지 않는 게 위험한 상황이다. 졸고 있거나 동승자와 수다를 떨면서 한눈을 팔아 미처 경적을 누를 때를 놓친 것이다.

보통 그들은 “옆으로 지나간다”고 꼭 ‘말’을 하고 간다. 그들은 자동차가 원래 말하는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다만 표현이 동물의 울부짖음, 또는 개 짖는 소리처럼 무정형적이고 서투를 뿐이다. 중국 차에는 경적 대신 마이크를 달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막파열음은 적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경적의 고저장단(高低長短)보다는 훨씬 다양한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나 오늘 바쁘니까 먼저 갈게” “왼쪽에 차가 있으니까 오른쪽으로 추월할게” “매연 좀 맡아 봐. 냄새가 어때?” 등등.

나는 중국인들이 큰소리로 싸우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도 경적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청력이 손상됐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거기다 생활 속에 녹아 있는 폭죽의 폭음도 중국인들의 집단적 소음성 난청에 기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행자들도 큰 불만은 없어 보인다. 보행자들의 무단횡단과 신호 위반도 다반사다. 여기 사는 서양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서로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파고들어 길의 공간 효율을 극대화한다. 특히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는 3초간은 해방구다. 어느 방향에서든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만 없다면 도로를 누빌 수 있다.

무법천지치고는 교통사고가 적은 편인 듯하다. 중국 정부는 2010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6만5525명이라고 발표했다. 2001년에는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으니까 차량 수가 급증하는 대신 사망 건수는 급감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2만5864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돼 더 내려간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이 지난해 45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으니까 인구 비례로 보면 중국의 사망자 수가 훨씬 적은 편이다.

실제로 상하이에서 주행하면서 사고 현장은 보지 못했다. 나는 원인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주경계(四周警戒). 사람들은 뭔가가 사각에서 매복해 있다가 치고 들어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렇게 태연할 수 없다. 상하이 도로에서 기습공격은 불가능하다.

이런 태연함은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나라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보면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중국인들의 태연함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무심함·냉정함·태평스러움·꿋꿋함·참을성 등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만만쩌우(慢慢走)’. 중국 사람들이 헤어질 때 꼭 하는 말이다. 천천히 가라. 천천히 주행하거나 보행하기 때문에 급제동과 같은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고 사고를 피할 수 있다.

희한하게 무질서 중에도 질서가 있다는 걸 느낀다. 그건 다른 의미에서의 예측가능성이다. 교통질서를 잘 준수하는 나라에서는 법규대로 하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안 지키는 사람이 있어서 사고가 난다. 상하이에서는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을 거라는 예측가능성이 있다. 아무도 길을 양보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쉽게 충돌하지 않는다. 내륙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상하이에서 교통 전지훈련은 효과적이었다. 어느덧 상하이의 교통문화가 내 몸에도 배기 시작했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6월23일까지 중국 자전거 여행을 하는 필자의 소식은 매일 미투데이(http://me2day.net/zixingch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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