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는 언제나 옳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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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금융 파업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헬리콥터가 금융연수원 상공을 날았고 일 주일을 끌던 금융 노동자들의 농성이 해산되었다. 수법이 좀 야비해 보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주장보다는 대주주들이 결정하고 정부가 승인한 은행 합병에 노조가 간섭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말에 무게가 더 실려 보인다. 이 나라가 아직 사회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금융 파업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비록 금융 개혁이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이 사태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 사회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노동자와 정부 양측이 서로 힘겨루기를 벌인다는 점이다. 몇 개월 전 전국을 들끓게 만들었던 의료대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와 의사협회는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없이 평행선을 그렸다. 정부는 의사들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공격했고 의사들은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뛰었다.

사실 집단이기주의라는 표현은 잘못이다. 굳이 그 표현을 써야 한다면 집단이기주의는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주장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패권주의다.

금융노조와 정부, 의사협회와 정부는 오로지 실력 대결로 사태를 해결하려 들었다. 만약 이 싸움에서 어느 한측이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했더라면 오히려 패자가 승자에게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상대방을 무릎꿇리고 나면 필요 이상으로 인정이 많아지고 무원칙할 정도로 승자의 너그러움을 보이는 게 우리식 싸움이기 때문이다.

패권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세불리기다. 일단 다수가 되면 소수를 마음대로 압제할 권리를 얻은 것처럼 여기는 게 패권주의다. 그래서 패권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장애인, 동성애자, 나아가 사생활 비디오를 공개당한 한 여가수에 이르기까지 패권주의 하에서는 소수가 살아남을 수 없다.

다수를 앞세우는 게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일찍이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유명한 말로 민주주의의 요체를 설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벤담은 그 대단히 위험한 발언으로 오히려 그가 여러 면에서 보여준 재기와 상상력, 진보적 성향의 가치를 반감시켰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민주주의와 사회 진보를 크게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다음 세대 인물인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그 점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벤담은 쾌락 지수를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엄정하게 계산하려 했다. 지금 화학을 공부할까, 아니면 해변으로 놀러 갈까? 이게 벤담이 던진 물음이다. 화학 공부는 괴롭지만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고, 해변에서 노는 건 즐겁지만 공부를 팽개쳤다는 죄의식이 든다. 양자의 쾌나 불쾌를 계산해서 올바른 행위를 결정하면 된다.

아주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우선 밀은 벤담의 질문을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꾼다. "여섯 잔의 맥주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중 어느 것이 더 쾌락적일까?"

르네상스 시대의 시를 읽을 것이냐, 텔레비전 축구중계를 보면서 맥주를 마실 것이냐 중에서 선택하라면, 보통 사람들은 어떤 것을 택할지 뻔하다. 지나치게 쾌락을 중시하는 질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더 세련된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다. 예컨대 국고에 보관된 세금이 남았을 경우 대학에 기금을 내주어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남은 세금을 반환받을 것인가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이것 역시 답은 뻔할 것이다.

밀은 그것이 장차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만약 모두가 행복과 쾌락만을 기준으로 행동한다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당연히 돼지의 신세가 더 나을 것이다. 진흙탕에서 마음껏 뒹구는 게 철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쾌락적이라는 건 분명할 테니까.

이 까다로운 문제에 대한 밀의 해법은 간단하면서도 명쾌하다. 두 가지 경험을 모두 판단할 수 있는 유능한 판관들만 불러 어느 쪽을 선택할지 투표하게 하자는 것이다. 맥주의 맛과 셰익스피어를 둘 다 알아야만, 또 진흙탕에서 뒹구는 즐거움과 플라톤을 읽는 즐거움을 둘 다 경험해야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맥주의 맛은 누구나 마셔보면 알 수 있지만 철학의 즐거움은 상당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맥주를 철학보다 쾌락적 우위에 두는 것은 잘못이다.

밀의 결론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스럽고 더 가치있는 쾌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 물론 그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플라톤을 공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시장의 수요와 무관하면서도 귀중한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대단히 필요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다. 특히 인간의 성격을 돌보고 양육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그런 것에 속한다. 교양이 없으면 교양을 판단할 능력도 없다."

이렇게 밀은 무방향적이고 무비판적인 다수의 행복이라는 논리를 반박한다. 민주주의란 다수의 뜻이라고 해서 무조건 관철되어야 하는 제도가 결코 아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있듯이 천박한 민주주의도 있다. 혹시 밀의 주장을 엘리트 지향적이라고 비판한다면, 자유는 누릴 가치가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대결에서 금융노조와 정부는 둘 다 '국민의 뜻'을 운위했다. 양측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최소한 양측이 다수의 힘을 등에 업으려 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건 명백한 패권주의다. 이런 식으로만 나가면 당연히 대화나 타협은 없다.

새천년 첫 해의 마감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벤담에 머물러 있다. 물론 얼마 전까지는 그마저도 못되었지만.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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