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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최고의 춤꾼이여 … ’ 26년 동안 제자 생일 날 시 선물한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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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철 교사가 직접 지은 생일 시를 제자에게 읽어주고 있다
안준철 교사가 직접 지은 생일 시를 제자에게 읽어주고 있다

‘네가 태어난 꽃 피는 사월이 오면/ 이제는 가장 먼저 네 갸름한 얼굴이 떠오르겠다/ 변화라는 말 성장이라는 말이/ 어찌나 빛나 보이던지/ 어찌나 가슴에 와 박히던지’. 흡사 연애편지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글이다. 지은이는 전남 순천 효산고의 안준철(58) 교사. 안 교사는 1987년 부임 이래 80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을 위해 손수 생일 시를 지어왔다. 모든 학생의 생일마다 제자를 주인공으로 한 사랑의 시를 지었다.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꿈을 이루지 못해 마음 고생하는, 가정환경에 좌절하는 제자들을 안 교사는 이 편지로 보듬어 왔다. 김슬기 기자

봄방학 때면 학생들에게 먼저 안부 전화

“선생님 반에 배정되는 건 정말 엄청난 행운이에요.” 올해 2월 졸업한 정다혜(19)씨는 안 교사와의 학교생활을 추억했다. 안 교사는 매 학년 봄방학 때 학생들에게 전화를 건다. 교사가 반 학생들에게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네는 셈. 이후 제자들의 생일 한 달 전부터 e-메일을 주고받으며 낯선 대화를 오누이 같은 대화로 바꿔나간다. 정씨는 “선생님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 한 권은 될 것”이라며 안 교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정씨는 한때 예술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꿈을 접었다. e-메일을 주고받으며 이 사정을 알게 된 안 교사는 정씨에게 ‘춤추는 쇼핑몰 CEO’라는 제목의 시를 건넸다.

 ‘우리 반 최고의 춤꾼이여!/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세계 최초의 춤추는 쇼핑몰 CEO가 되어/ 소복소복 행복하기를’. 정씨는 “선생님의 생일 시를 받고 나서 춤과 쇼핑몰 창업의 꿈을 둘 다 이루어 보겠다는 도전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안 교사는 제자들에게 쓴 시를 모아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을 펴내기도 했다.

 제자들의 교우 문제도 지나치지 않는다. 대화를 거듭하며 문제 해결에 나섰다. 졸업생 조우리(19)씨는 한때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려 했다. 힘들 때마다 “조퇴하고 싶다”는 조씨를 안 교사는 학교에 붙들며 대화를 나눴다. 친구들 간의 오해 때문에 혼자서 학교생활을 하는 제자의 상황을 알게 된 안 교사는 “네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라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혼자만의 시간도 나쁘지 않아.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 보고 너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이번 기회에 다른 친구들을 사귀어 보렴”이라고 제자를 격려했다. 용기를 얻은 조씨는 시간을 가지면서 천천히 새 친구를 사귀었고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영어시간엔 영어로 한마디씩 소소한 대화

효산 고는 상업계 학교다. 학생들 대다수는 영어담당인 안 교사에게 “영어 하나도 모르는데요”라는 고민을 토로한다. 제자들에게 성취감을 안겨주고 싶었던 안 교사는 영어 시간 출석을 ‘영어 문장으로 만들어 답하기’로 정했다. 난감해하는 제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으면 아이러브유(I Love You)로 답해도 좋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출석을 부를 때마다 학생들이 안 교사에게 너도 나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영어 출석은 스몰토크(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일상의 소소한 대화)로 교감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출석에 답하는 제자를 향해 ‘네 꿈은 무엇이니(What’s Your Dream)’라고 대화를 이어가며 학생들의 고민을 살폈다.

그러자 점차 수업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영어에 흥미를 보이는 학생이 늘어났다. 중간·기말고사에서 백점을 맞는 학생, 모의고사에서 영어 점수를 두 등급씩 올리는 학생도 나타났다. 안 교사는 “방학 동안 영어책과 관련된 슬라이드 쇼와 사진을 준비해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를 높인 점이 학습 동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수업에는 호통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학생과 대화하는 것이 안 교사의 교육방침이다. 수업 시간에 휘파람 부는 학생에게는 ‘어디서 파랑새가 들어 왔나 보다’라고 돌려 말해 학생 스스로 잘못된 점을 깨닫게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됐는지 모르기 때문에 반복하는 거예요. 무조건 타박하기보다 제대로 알려주면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지지요.”

 정년을 앞둔 안 교사는 올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담임을 맡았다. “교직을 선택해 제자들 생일마다 시를 써 준 것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에요. 마지막 담임이라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전보다 더 큰 사랑을 쏟아 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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