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전설 쉽게 해석 '신라인의 마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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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산은 지금의 경북 현풍 비슬산이다. 신라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성사(聖師)가 이곳에 살았다. 한 사람은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한 사람은 북쪽 굴에 살았다.

북쪽 사는 도성이 관기를 보고 싶어하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려 하면 나무는 일제히 북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나무가 쏠리는 대로 달밤이면 노래하면서 구름길을 헤치고 늘 서로 왕래하였다. '삼국유사' 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의 마음결이 바람결에 얹혀 숲 속의 나무들까지 기울게 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소통의 현장이다.

지금에 와서 까맣게 잊은 설레도록 고마운 말씀이다. 이름 그대로 한 사람은 미묘한 기미(機微)를 관찰할 줄 알았고, 한 사람은 이미 도를 이뤄 깨달은 이였다. 그래서 그는 바위 사이에서 몸을 빼어 하늘에 둥실 떠올라 떠나갔다. 세상은 덧없고, 깨달음은 영원하다.

신라 사람들은 도성이 머물던 굴 아래에 절을 지어 그 자취를 기렸고, 그때마다 신령스런 응험이 있었다.

일연은 왜 이 이야기를 책에 실었을까□인간과 자연의 교감이 단절된 시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해 신령스런 응험도 끊어진 그의 시대를 향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삼국유사' 를 읽다 보면 떠오르는 상념들이 끝이 없다. 갑자기 우물 용의 옆구리에서 닭의 부리를 한 여성이 나오고, 어느날 문득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걸린다.

노래 한마디에 쳐들어왔던 일본군이 얌전히 물러가는가 하면, 당나귀 귀를 한 임금은 뱀을 덮고서야 편히 잠을 잔다. 터무니없다 하기엔 어조가 너무도 진지하고,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도무지 납득 안될 소리 뿐이다.

이도흠씨의 새 책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는 이 도무지 납득 안될 이야기 속에 담긴 신라인의 마음과 신화를 해체해 우리 문화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는 야심찬 저작이다. 모두 21개의 토막글에 '삼국유사' 속 이야기로 들어가는 비밀스런 지도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저자는 전체 신라사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삼국유사' 속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을 골라 신화 읽기의 실제를 보여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이야기들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맥을 못추고 진실을 드러낸다. 코드를 잃어버려 다시는 열 수 없을 것만 같던 비밀의 문들이 하나 둘 빗장을 푼다.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 이야기에서 풍류도 시대 신라인의 세계관과 삶의 원리가 구체화되고, 선도산 성모 사소가 부처를 만나는 이야기에서는 절이 별처럼 들어섰다던 그 시대 불법의 신속한 전파를 읽어낸다.

황룡사의 출현에 얽힌 이야기와 독룡(毒龍)의 의미, 그 안에 담긴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의 행간이 훤히 들여다 뵈고,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진지왕과 도화랑의 목숨을 건 사랑 뒤에 담긴 정치사의 맥락도 꼼짝 없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혜성이 몰고온 변괴를 바로 잡은 융천사, 지팡이 끝에 자루를 달아 지팡이 혼자서 탁발을 하게 했던 양지, 스치듯 성인과 만난 스님들과 민중 속에 스며든 불교가 마침내 광덕 엄장에 와서 극락왕생을 이루는 이야기 등은 차라리 설화로 읽는 신라의 역사다.

이 책은 풍류도로 시작한 신라인의 정신세계가 풍류만다라의 시대를 거쳐 저 찬란한 화엄만다라의 시대를 열기까지의 과정과, 마침내 '국종망(國終亡)'의 처용설화로 큰 낙차를 보이며 그 광휘를 사윌 때까지 신라인의 마음의 궤적을 낱낱이 분석하고 있다.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우리 문화와 예술을 형성하는 고유의 원리를 분명하게 감지한다. 그것을 정(情)과 한(恨)이 어우러지는 화쟁(和諍)의 문화라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한 모퉁이에서 가장 늦게 일어나, 화쟁의 원리로 모든 대립과 갈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아울러, 마침내 통일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인들의 저력과 만난다.

경계를 갈라 네것 내것을 따지며 갈등하고 싸우는, 거룩함과 총체성이 사라진 지금 세상에서 꿈꾸는 천년 왕국의 신화는 정녕 허망한 꿈일 뿐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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