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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노 후지히코 〈갤러리 페이크〉

중앙일보

입력

곰곰히 생각해보니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그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10여년간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만나왔음에도 내게 남은 거라곤 역사적 정보(출토시기, 장소, 사냥감이 많이 잡히기를 기원)와 정규교육을 무사히 마쳤다는 증거로서의 교양정도가 전부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시험에 도움될만한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한 번도 마음에 와닿는 '그림'은 아니었다. 이토록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을 거쳐왔음에도 왠지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말하면 비웃음살 것만 같고, 구석기 예술품, 미술의 기원이라고 말하지만 온전한 그림으로 인정하는 것도 어색하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그림들과의 만남이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거다. 어떤 지식들이 꽉 막고 서서 내 느낌을 말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미술과 내 일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미술과 일상 사이에는 아마 이발소의 그림들과 르브르 박물관의 그림 사이의 딱 그만큼 단절이 있지 않을까 싶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라는 스페인 내전관련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적잖은 충격일지 모른다. '피카소는 추상화(?)의 대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읽힐리가 없어'라며 숨겨진 의미를 쥐어짜내면서 전문가의 감상법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갤러리 페이크〉에서는 이런 고민을 접어도 된다. 그저 자유롭게 자기가 본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림과 만나면 된다. 모네의 그림을 보고 "이 타는 듯한 색채!(감탄감탄)" 라고 교과서적인 정답을 말할 수도 있지만, "일을 마치고 수고했다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네"라고 소박하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거다.
 
갤러리 페이크. 취급상품은 명화모조품이고, 그밖에 손상된 그림을 복원하거나, 암거래되거나 밀반출된 미술품들을 웃돈을 받고 팔고있는 곳. '쓰레기'라는 비웃음을 사지만 쓰레기에서 곰팡이 꽃이 피어나듯, 꽤나 고상한 사람들이 주요고객이다.

생태계가 순환되듯, 미술계도 돌고돌아서 '고상'은 쓰레기를 필요로 하였기에 이곳은 쓰레기이기도 하지만 알고보면 주류미술계샴쌍동이이기도 하다. 역시나 그곳의 관장 또한 권력들과 은밀하게 친한척하고, 주류미술계와 대놓고 친하지 않은 인물. 뉴욕의 국제적인 미술관의 큐레이터였지만 미술계의 추악한 음모에 의해 쫓겨난 독특한 이력의 후지타 관장은 미술계에서도 독특하지만, 만화계에서도 그닥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 싶다.

〈맛의 달인〉의 지로가 주류질서인 아버지의 권력에 도전하며 '있는 집 애'틱한 반항아 역할에 충실했다면, 〈갤러리페이크〉 관장인 후지타는 음모에 의해 밀려난 아버지의 원한에서 자유롭지만 그와 관계없이 주류적인 질서에서 벗어나있다. 게다가 〈마스터 키튼〉처럼 방랑자같은 풍모를 보이지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영웅도 아니다.

예술도 모르는 정치인들에게 열심히 웃돈 주고 그림을 파는 걸 보면 예술에 대한 사랑도 없는 거 같고, 모조품이나 장물들을 파는 걸 보면 바른생활+정의의 사도는 아닌 것 같고, 모네의 진품을 첨 보는 아저씨에게 단돈 5만엔에 팔고 단골에겐 가짜를 주는 걸 보면 상도덕을 잘 지키는 상인도 아닌 것 같다.

뭔가가 떠오른다. 전면적인 저항이 아니라 권력과 친한척하면서 뒤통수치는 고수 반항아! 교묘하게 선악의 이분법을 흐려놓고 다니면서 권력을 조롱하는 아웃사이더!

정치인들과 야쿠자들은 돈세탁을 하기 위해 열심히 미술품을 수집하고, 자본가들은 미술에 투기를 한다. 수집광은 예술품 애호가가 되고, 투기꾼은 미술계의 후원자이기도하다. 이 상황에서 예술을 사랑한다는 큐레이터가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정치인에게 대가의 진품을 팔지말라고 항변하지만 이것은 순진하고 어줍잖은 발상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극소수의 사람만 즐겨도 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예술은 대중의 것 아닙니까?"
"대중은 것이라고... 그건 틀린 얘기야. 예술은 그 미를 알고, 또한 독점할 능력이 있는 사람의 것이야!"

명화라서 비싼건지 비싸서 명화인건지 헛갈리는 현실에서 '진짜예술품인 명화'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예술을 모르는 투기꾼의 논리를 도와주는 것 뿐이다. 어차피 예술이라는게 자기 만족적인 것들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예술은 즐기는 사람의 몫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좀더 솔직하지 않을까? 예술지상주의=명화주의들은 미술품의 투기화와 한배의 자식이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 될까?

게다가 미술품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술의 순수성을 고집하고, 인류의 문화유산을 빙자하여 명화만을 '작품' 취급하는 것은 결국 작품가격은 가격대로 올려놓고 돈은 돈대로 벌면서 돈의 위협으로 오랫동안 미술의 일상화를 막아 온게 아닌가 싶다. 그에 연유한 근거없는 교양들과 문화적 자부심들은 미술감상법이라든지 지식 등을 전형화시키면서 미술과 일상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한번도 그림에게 말을 걸어 볼 수도 없었고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면서 창 너머 본 해바라기가 생각났다는 훌륭한 대답을 두고 '뭐뭐한 노란 색채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 대접받는 문화적 풍토에 새삼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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