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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줌마 셋', 아시아 여성 최초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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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 등반을 마치고 로스테레스 호수 앞에서. 왼쪽부터 채미선·이명희·한미선 대원. [사진 파타고니아 원정대]

여기 세 여자의 돌 같은 손이 있다.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손마디는 곡괭이 날처럼 휘었다. 이명희(39·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 한미선(40·서울등산학교), 채미선(40·자유등반클럽). 지난 2월 26일 남미 파타고니아 산군에 솟아 있는 거벽 피츠로이(3405m)를 등정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알파인 클라이머들의 손이다.

‘아줌마’ 셋뿐인 파타고니아원정대(한국산악회 후원)는 직벽 등반 길이 1050m, 벽 아래에서 출발해 되돌아오기까지 4박5일의 험준한 거벽을 하루 한 봉지의 분말식을 나눠 먹으며 등정했다. 아시아 여성팀으로는 처음이고,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지난 1월 17일 출국해 두 달 동안 남미의 거벽들을 섭렵하고 돌아온 이들을 만났다. 우리 나이로 마흔을 넘긴 아줌마들이 어떻게 그 험난한 벽에서 5일을 견딜 수 있었을까. 직접 보여주고 싶었든지 노트북을 꺼내들고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마우스를 잡고 있는 한미선씨의 오른손에 시선이 멈췄다. 거북등에 곡괭이 날…. 나머지 두 사람의 손등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원래 이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안쓰러움은 곧 가셨다. 셋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바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가족들이 이런 손을 보면 마음이 아플 것 같은데. 안 말리나요?
채미선(이하 채): 저는 이번 원정 다녀오고 시아버지한테 혼났어요. 시댁에는 그냥 여행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시아버지가 뒤늦게 신문을 보셨나 봐요. 전에는 제가 하는 일이 그렇게 위험한 건지 모르시다가 신문을 보고 전화하셔서 ‘다시는 그런 데 가지 마라’ 하시더라고요.

한미선(이하 한): 그래서 ‘네’라고 했어?

채: 아니 대답 안 했지. ‘건강하게 잘 다녀왔습니다’라며 대충 얼버무렸지.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 ‘네’라고 대답하면 시아버지 속이는 게 되잖아.

한: 이그, 그럴 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해외 원정 떠날 때 가족들한테 뭐라고 해요?
한: 저는 열두 살 딸이 있는데, 애한테 가장 미안하죠. 이번에도 원정 떠나기 직전에 ‘엄마 다녀올게’ 문자를 남겼어요. 그랬더니 애가 일기장에 ‘나를 두고 산에 가는 엄마는 죄인이다’ 이렇게 썼더라고요. 떠나기 전에는 마음이 아팠는데, 우리 팀이 피츠로이를 등정하고 중앙일보에 난 걸 애아빠가 딸한테 보여줬나 봐요. 아직 산에 있는데 문자가 왔어요. ‘엄마는 나의 영웅이야’.

등반을 마친 세 여성 클라이머의 손등. 갈라지고 부르트고, 부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다.

-당시 등반 상황을 정리하면?
채: 저는 이번에 ‘등반이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 처음 느꼈어요. 올라가면서 텐트나 침낭 없이 비바크색(임시 야영할 때 뒤집어쓰는 얇은 천) 하나만 가져갔는데, 세 명이 덮고 자려니까 너무 좁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찢었는데, 그래도 발목 아래는 밖으로 노출돼요. 아침에 일어나니 발에 동상이 걸려 너무 춥고, 쪽잠을 자서 엉덩이는 시리고. ‘내가 여길 왜 왔나’ 너무 서럽더라고요. 그래도 이 나이에 해냈다는 게 뿌듯했어요.

-암벽에 올라가면 끼니는 어떻게 해요?
한: 보통 물을 끓여서 준비해 간 분말 수프로 때우죠. 근데 벽에 붙으면 거의 못 먹어요. 3일째부터는 고드름만 깨 먹고, 또 벽 경사가 가팔라서 용변을 제대로 못 봐요. 소변만 하루에 한 번 정도, 먹은 게 없으니까 대변은 볼 일이 없죠. 아, 마지막 날 명희가 설사가 나서 급하게 한 번. 그날은 고드름도 못 먹었거든요. 따뜻한 물을 못 먹으니까 장이 꼬인 거죠. 마지막 이틀은 허리 벨트를 풀 수 없을 정도로 벽이 가팔라서 하루에 서너 시간, 벽에 기대서 잠깐 눈만 붙였어요. 마지막 날 구간이 애초 설벽(눈으로 덮인 암벽)인 줄 알고 갔는데 가 보니 단단한 청빙인 거예요. 우리는 설벽용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웠는데 얼음이 너무 단단해서 아이젠 날이 안 박히는 거 있죠. 계속 킥을 세게 하니까 나중에는 종아리가 터질 것 같고, 체력도 계속 떨어지고 그날이 가장 힘들었어요.

-이명희씨는 산에서 지금 남편을 만났죠?
이명희(이하 이): 2001년에 파키스탄 원정을 갔는데, 남자 여섯에 여자는 저 하나였죠. 혼보르(5500m) 등반 도중에 미끄러져 수백m 크레바스 아래로 빠질 뻔했어요. 최석문(39·노스페이스)이 저를 낚아챈 덕분에 살아났죠. 근데 추락하는 과정에서 제 피켈(손도끼)이 최석문의 눈 위를 찍어서 상처가 났어요. 산을 내려와서 최석문이 “어쩔 거냐. 책임져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다. 내가 데리고 살게” 그랬죠.

채·한: 말은 똑바로 해라. 최석문씨가 너를 데리고 사는 거잖아. 쟤는 한 팀으로 등반을 가도 밥을 잘 안 해요. 집에서는 더 안 하고요.

-두 미선씨도 산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했나요?
한: 취미로 산에 다니다가 누구랑 같이 다니고 싶어서 동호회에 글을 띄웠는데, 처음 연락 온 사람이 지금 남편이에요. 거기서 처음 벽을 했어요.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도 벽에만 몰입하게 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우리는 신혼여행도 호주의 블루마운틴이라고, 암벽 산군으로 갔어요. 열흘 동안 등반만 하다가 왔죠.

채: 저는 전남 장흥이 고향인데, 명절 때마다 지리산에 들러 산행을 한 다음에 집에 갔죠. 2006년에 벽소령 대피소로 갔는데, 그때 지금 신랑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거기서 전화번호를 따와서 제가 꼬셨죠. 남편은 산악인은 아니고 국립공원공단 직원이에요.

-가족들과도 산에 자주 가요?
이: 우리는 매주 가는 편이에요. 밥도 해먹고, 한 텐트에서 같이 자고. 자연에서 뛰노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아들이 또래보다 자의식이 강해요. 뭐든 혼자서도 잘하고요.

한: 우리 애는 백일 지나면서부터 산에 갔어요. 배낭 캐리어에 넣고 다녔죠. 벽 아래까지 업고 가서 한 사람은 애 보고, 한 사람은 등반하고. 한 사람이 내려오면 애 보던 사람이 교대해서 올라가고. 다섯 살 때부터는 벽 등반도 시켰어요.

-딸이 등반을 하고 싶다고 하면?
한: 자기가 한다고만 하면…. 지금은 살이 쪄서 썩 잘하지는 못하는데, 어릴 때부터 등반을 시켜서 밸런스는 좋은 편이에요.

-주부와 등반가 역할을 겸해야 하는데 힘든 점은?
이: 크게 어렵지 않아요. 아무래도 부부 클라이머니까. 남편이 원정 간 동안은 저 혼자 살림하는 거고요. 우리는 소속사에서 어느 정도 후원을 받아요. 많지는 않지만 그 정도 돈이면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아요. 애 학원비와 등반 장비 사는 것 말고는 돈 쓸 일이 별로 없거든요.

-여자들끼리 가면 남자들과 같이 갈 때와 다른 게 있나요?
이: 아무래도 여자들끼리가 편하죠. 전 남자들과도 원정을 많이 갔는데, 좀 힘들었어요. 신체 조건이 다르니까 괜히 위축되는 느낌이 들어서. 나 때문에 원정이 잘 안 되는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여자들끼리 가면 체력도 생각도 비슷하고, 생리적인 문제도 비슷하니까.

-요즘 산에 입문하는 주부가 많은데.
한: 저는 서울등산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는데, 주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산에 가면 리지 등반(암릉을 오르는 등반)을 하는 여성이 많아요. 제대로 된 장비나 교육 없이 아는 사람들을 따라서 하는데, 사고 위험이 커요. 요즘 등산학교에서 하루나 이틀짜리 리지 등반을 교육하는 곳도 있거든요. 그런 데 가서 배우는 게 좋죠.

이: 저 등반 입문할 때 선배들이 그랬어요. ‘센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센 놈이다’고. 몇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라 꾸준히 하게 되면 정말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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