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감에 목청높인 재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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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5단체의 회장과 부회장단 10명이 함께 모여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제목도 '현 시국에 대한 경제계 선언' 이다. 경제5단체 회장.부회장단이 함께 만난 것도 이례적이지만 선언문 내용은 더욱 강경했다.

노동계의 동계투쟁이 예고된 가운데 현 정부 들어 노사관련 개혁과정에 재계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덜 먹혀들었다는 피해의식이 '건의' '입장' 의 차원을 넘어서 '선언' 에 나서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 경영자의 눈에는 개혁의 칼날이 기업에만 유독 서슬 퍼렇고 노동계엔 무딘 것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조남홍(趙南弘)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사회기강마저 이렇다면 총체적 경제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고 말했다.

◇ '이대로는 안된다' 는 위기감 고조=경제5단체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탓인지 발표장 분위기는 긴박감이 감돌았다. 발표 내용은 현 정부 들어 가장 강도 높은 재계의 비판과 주문으로 가득 찼다.

회의 분위기도 사뭇 격앙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총이 초안을 마련해 토의에 부친 이날 발표문은 "정부와 노동계를 너무 자극하는 것 아니냐" 는 일부 의견이 있었지만 "어차피 대결구도로 비춰질 바에야 할 말을 확실히 하자" 는 강경론에 묻혔다는 후문이다.

점심 모임이었는데도 식사를 거른 채 예정시간보다 1시간 정도 늦은 오후 1시30분까지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지난 주말 경총이 제안해 전격 마련한 이번 모임은 정부와의 사전 교감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총 관계자는 "독한 소리를 하는데 사전 상의가 필요했겠느냐" 고 반문했다. 경제5단체는 두주일 안에 실무회의를 열어 이번 선언문 내용을 구체화할 계획이어서 이번 일이 일회성 입장 표명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 노동 관계법 개정 난항 예고=경제5단체는 이제 노동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경쟁력과 고용의 유연성을 저해하는 어떤 법 개정도 한시적으로 반대한다' 는 입장 표명에 따라 앞으로 노사정위원회 운영과 노동관련 입법 과정에서 더욱 진통을 겪을 전망이다.

경총 김영배 상무는 "문제되는 법령이 많지만 우선 모성보호 관련 입법안과 비정규직 근로자의 보호, 근로시간 단축, 노조 전임자 급여지급 금지 조항 등의 개정과 관련해 우리의 보완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적극 반대하겠다" 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경제위기의 가장 큰 책임이 재벌과 재계에 있는데도 먼저 뼈를 깎는 고통분담을 하지 못할 망정 노동자와 국민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 '정부.정치권도 잘못 많다' =한 참석자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노동계도 문제지만 이를 방조하는 정치권과 국회에도 문제가 많다" 고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발표문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인권이라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이 사회 각층의 집단이기주의에 왜곡.악용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고 밝혔다.

특히 공기업의 구조개혁 과정에서 횡행하는 이면합의 관행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든 대응할 뜻을 강하게 비췄다.

趙부회장은 "밝힐 수 없지만 공기업 등의 이면합의에 대한 증거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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