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무지갯빛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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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호 09면

1,2 무라노 섬 ‘글라스트레스’ 전시장 3 베니니의 볼레’, 디자인 타피오 위르카카4 대롱 끝을 불어 꽃병을 만들고 있는베니니의 유리공예 장인

거리 곳곳에 각양각색의 유리 조형물
무라노 섬 수로변은 유리공예품을 파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상점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공장으로 연결됐다. 관광객에게 방문을 허용한 곳도 많았다. 광장 곳곳에 설치된 각양각색의 유리 조형물은 말 그대로 무라노 사람들의 자부심이었다. 유리공예는 오일 램프로 유리를 가열하는 램프워킹, 혹은 토치워킹이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고온에서 액체로 바뀌는 실리카 모래를 쓴다. 장인들은 녹은 모래가 액체에서 고체로 바뀌는 와중에 부드러워지는 순간을 낚아채 원하는 형태의 제품을 만들어 낸다.

글라스공예 메카, 이탈리아 무라노 섬을 가다

5 유리병 제작 과정

기법은 복잡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무리네(Murrine)다. 여러 색상의 물렁한 유리를 여러 겹 붙인 후 긴 막대나 대롱에 넣어 엿처럼 길게 늘이는 것이다. 차가워지면 단면으로 잘라내 수많은 꽃이 들어가 있는 듯한 아름다운 무늬를 얻을 수 있다.

1950년대 무라노에서 발명된 솜메르소(Sommerso) 기법은 두 가지 색상의 유리를 사용해 대비 효과를 준 것으로 꽃병이나 화분, 조각 작품에 많이 사용한다. 이 밖에 흰색 불투명 유리를 사용하는 라티모(Lattimo), 두 개의 다른 유리를 붙이는 인칼모(Incalmo), 선을 넣는 필리그라나(Filigrana), 얼음 효과가 나는 자초(Giaccio) 등 다양한 기법이 있다. 이를 위해 바람을 불어넣는 긴 대롱, 집게, 폰텔로라 불리는 철판(여기에 놓고 유리를 굴리며 형태를 만들거나 붙이거나 한다), 그리고 타잔티라는 이름의 유리 자르는 가위 같은 특별한 기구들이 필요하다.

무라노의 유리박물관이 무라노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무라노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때다. 지난해 11월 팔라초 카발리 프랑케티와 무라노섬의 베렝고 센터에서 동시에 열린 ‘글라스트레스(GLASTRESS)’ 전시는 유리공예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였다. 홀로그램 사진이 들어 있는 검은색 불투명 액자, 유리로 만든 경찰봉 하트 벽 장식, 세상을 왜곡시키는 볼록렌즈, 우주선처럼 생긴 거대한 책상 등 현대미술과 접목된 작품들은 무라노의 유리공예 회사들과 작가들이 공동 작업한 결과다.

6 베니니의 ‘오필라노’ 금 화병 7 베니니의 ‘디아만테이’8 39푸오키 아스트랄리’, 디자인 조르지오 비냐9 안도 다다오의 2011 신제품10 39심비오지’, 디자인 바블레드11 39바투티’12 베니니의 ‘베로네제’, 디자인 비토리오 재키

베니니의 성공 비결은 예술가와 협업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기차역에서 배를 타고 무라노 섬의 첫 정류장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5분 정도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리공예 회사 베니니(VENINI) 매장이 나온다. 산마르코 광장 옆 레온치니 광장에서 작은 앤틱 상점을 경영하던 자코모 카펠린과 유리공예에 열정을 가지고 있던 밀라노의 변호사 파올로 베니니가 만나 1921년 창립한 회사다. 이들은 이듬해 열린 제13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첫 작품을 선보인 이후 유리공예가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베니니는 대량 생산과 대량 유통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예술가·건축가들과의 협력 과정을 통해 창조적이고 예술성이 가득한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베니니의 아트 디렉터인 로베르토 가스파로토 역시 건축가다.

가스파로토의 안내로 공장에 들어가니 열기가 훅 밀려왔다. 넓은 공장 곳곳에 설치된 불가마들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반소매 차림이었고 이미 땀범벅이다. 중앙 불가마 앞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사람이 손에 쥔 긴 대롱을 좌우로 굴리고 있다. 베니니의 마에스트로다. 그는 대롱을 굴리다가 갑자기 확 꺼냈다. 대롱 끝에는 녹아서 물렁물렁해진 시뻘건 유리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이어 대롱을 휙 돌려 마치 접시 돌리기를 하는 서커스 단원처럼 아직 뜨거운 유리 덩어리를 머리 위로 높이 올린 후 반대쪽 대롱 끝을 입으로 훅 불었다. 뜨거운 유리가 입이나 얼굴로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할 새도 없이 마에스트로는 유리 덩어리가 달린 쪽을 밑으로 내리고 가마 옆 작업대로 갔다. 계단 같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더니 유리 덩어리를 쇠틀 안에 넣고 대롱 끝을 불었다. 팀원 한 사람이 붉은 유리덩어리 위를 집게로 잡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다. 틀에서 나온 유리는 드디어 본연의 색인 녹색으로 보였다.

마에스트로는 자리에 앉아 대롱을 좁은 틀 위에 걸치고 빙글빙글 돌렸다. 동시에 다른 사람이 불가마에서 막 꺼낸 뜨거운 유리 덩어리를 가져와 화병처럼 생긴 유리의 가장 끝부분에 붙였다. 마에스트로는 대롱을 돌려 화병이 빙글빙글 돌게 하면서 뜨거운 유리덩어리를 자신의 화병 끝에 능숙한 솜씨로 빙 돌려 붙였다. 화병 받침이었다.

형태가 완성되자 마에스트로는 집게로 대롱과 유리 사이를 톡톡 쳤다. 마치 칼로 절단하듯 아무 흠 없이 똑 떨어졌다. 신기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 일을 했다는 마에스트로는 “이제까지의 작업 중 유리에 데거나 다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형태가 완성된 유리들은 아직 뜨거운 상태다. 이것을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쇠 터널에 넣고 24시간 동안 서서히 식힌다. 갑자기 식히면 균열이 가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제품은 바로 깨 공장 뒤편에 버리면 다른 유리를 사용하는 업자들이 와서 수거해 간다. 검사를 통과한 제품들은 차가워진 유리를 다듬는 방으로 옮겨진다. 이곳에서 제품이 잘 설 수 있도록 바닥면을 갈고 표면에 광을 낸다. 명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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