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수원 살인’ 당신도 공범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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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한국의 도시는 냉혹한 괴물이다. 불 켜진 주택가에서 여성이 “잘못했다”고 울부짖을 때 옆집에선 TV 볼륨을 올린다. 거리와 골목에서 강간 살인범이 무고한 목숨을 삼킬 때까지 가족들만 애타게 찾아다닌다.

 미국에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어떻게 다룰까. 그래서 집어든 책이 『법의 재발견』이었다. 하버드 로스쿨의 석지영 교수가 쓴 이 책의 원제는 ‘법으로 본 가정(At Home in the Law)’.

책을 읽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비행기로 한나절이면 닿는 미국 사회가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 검찰청에서 가정폭력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자. ① 이웃에서 남녀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즉시 신고가 접수된다 ② 경찰이 출동해 가해 남성을 체포한다 ③ 검찰이 남성을 기소하면 법원은 자택 접근금지 명령을 내린다 ④ 커플은 장기간 별거에 들어간다. 이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 이른바 ‘기소 불포기 정책(no drop policy)’이다. 경범죄 정도에 그쳤든, 피해 여성이 기소에 반대하든 가정폭력범은 반드시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가정폭력을 용납해선 안 될, 심각한 범죄로 본다는 얘기다. 그 결과 “국가의 과도한 통제가 사실상의 이혼을 강요하는 셈”이라는 게 석 교수의 주장이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더 불편했던 건 수원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피해 여성인 A씨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지겹도록 계속된 ‘부부싸움 같은데…’였다. A씨에겐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사건 당일 밤 A씨가 범인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한 주민이 목격하지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흔한 부부싸움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A씨가 112 신고를 했을 때다. 전화기에서 비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112센터 근무자는 말한다. “아는 사람 같은데, 부부싸움 같은데….” 셋째 기회는 범인이 A씨를 폭행하고 있을 때다. 한 주민은 다음 날 아침 경찰에 뒤늦게 제보한다. “부부싸움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경찰과 주민들이 ‘부부싸움’으로 오인한 것은 어쩌면 2차적인 문제다. 남성의 완력에 여성이 끌려가도, 비명소리가 들려와도 부부싸움, 아니 부부싸움이란 말로 포장된 가정폭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범행을 방조한 것이다.

 “단순 성폭행”으로 판단했다는 경찰의 변명도 마찬가지다. 성폭행에 ‘단순’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성폭행은 인격 살인이나 다름없는 범죄다. 그놈에게 어떻게 복수하지, 누가 나를 손가락질하면 어쩌지, 내가 뭘 잘못해서 그랬지…. 피해 여성은 분노와 자책, 자괴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만약 미국에서 여성이 성폭행 위험에 놓인다면? 석 교수는 “여성이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에 총기로 맞설 경우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정당방위 요건을 요구받지 않게끔 법을 고치는 주(州)들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총도 없고 경찰 보호도 못 받는 한국의 여성들은 호신술이라도 익혀야 하는 것일까.

 수원 사건의 책임은 치안을 맡은 경찰에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집단무의식이 A씨를, 그리고 수많은 여성을 폭력의 제물로 만든 공범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국가 개입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사회와 가정폭력·성폭행을 심각한 일로 여기지 않는 사회 중 어느 쪽이 정상에 가까운지 묻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살인마와 사이코패스가 살고, 흉측한 가정폭력과 성폭행이 일어난다. 문제는 이들 범죄에 대응하는 법체계와 사회의 의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여성 보호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주요 10개국(G10)에 든다는 21세기 한국의 문명은.

 더 늦기 전에 가정폭력과 성폭행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을 바꾸는 사회적 자각이 시작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안드로메다의 불 켜진 도시에 사는 우리가 A씨를 추모하는 자세요, 딸들에 대한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