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힘, 삼겹살 파국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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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집단 행동으로 정부를 압박하는 ‘정치 농업’이 삼겹살 파동으로 재연됐다. ‘물가 강박증’에 걸린 정부는 치밀하지 못한 대응으로 소비자 불안만 부추겼다. 그나마 파국을 막은 것은 소비자의 힘이었다.

 대한양돈협회가 2일 삼겹살 출하 중단 계획을 접었다. 8시간 마라톤 협상의 결과다. 농식품부는 2분기 삼겹살 값 안정을 위해 할당관세(무관세)를 적용할 수입 물량을 2만t으로 낮췄다. 다만 공급이 달리면 원안대로 7만t까지 수입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합의를 이끈 보이지 않은 손은 소비자였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지난달 30일 “극단적인 양돈협회의 행동은 자제돼야 한다”고 성명을 냈다. 한국소비자연맹 등 9개 단체로 구성된 협의회는 “극단적인 행동은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처사”라고 압박했다. ‘최소 물량을 우선 수입하고, 가격 추이를 봐서 추가한다’는 이번 합의의 얼개는 소비자 단체가 제시한 해결책 그대로다.

 주부들은 양돈 농가의 으름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 주말 삼겹살 판매량은 3% 느는 데 그쳤다. 이마트 측은 “이 정도 변동은 평상시 수준으로 사재기는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양돈협회로선 출하 중단의 효과를 자신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양돈협회와 정부 모두 “소비자 피해와 반발이 협상의 최대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에서 양돈 농가는 소비자를 볼모로 잡았다. 볼모가 된 소비자는 지난해에도 100g당 2400원이 넘는 ‘금(金)겹살’을 사야 했다. 양돈 농가는 삼겹살 할당관세 물량 확대에 반대했지만 양돈 농가가 수입하는 씨돼지(5000마리)는 6월까지 할당관세(18%→0%)가 적용된다. 도매가가 생산비보다 낮다며 출하 중단을 선언하는 것도 농업 외 다른 산업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주장이다. 올 들어 송아지·삼겹살 파동을 일으킨 축산 농가의 소득(농가당 4218만원)은 전체 농가 평균보다 31% 많다. 서울대 이태호(농경제학) 교수는 “농민이 아우성을 치면 정부가 받아주는 식의 순환이 계속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농식품부와 기획재정부의 해명도 옹색하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사안이 양돈뿐 아니라 전체 농민을 옥죄는 것으로 비치는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정부는 관련성에 대해 손사래를 쳤지만 지금 농촌에선 총선 선거전이 한창이다.

 정부는 치밀하지 못한 대응으로 문제를 키웠다. 할당관세 확대는 삼겹살 성수기에 앞서 단행된 ‘선제적 물가 대응’이었다. 정부는 1월부터 양돈협회에 방안을 전달했지만 두 달 동안 협회를 설득하지 못했다. 가격 추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분석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삼겹살 가격은 과거 5년 평균치보다 높지만 하락세에 있었다. 4~9월 돼지고기 공급도 구제역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농촌경제연구원의 전망도 있는 터였다. 그러나 정부는 선제적 대응에만 매달렸다. 대통령 지시에서 비롯된 물가 강박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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