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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불법사찰과 손 봐주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4호 02면

“누군가와 전화할 때마다 ‘3인 통화’라는 마음으로 대화한다.”
50대 중반의 A씨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다. 며칠 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휴대전화든 유선전화든 어디선가 도·감청을 한다는 전제 아래 전화통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부처 차관보급(1급) 이상은 100% 도청·미행을 당하고, 국장급(3급)은 한 해에 서너 차례 간헐적으로 하는 것 같다. (사정기관에서)휴대전화는 언제든 도청할 수 있어 오히려 구내전화가 안전하다더라.”

이양수의 세상탐사

깜짝 놀랐다. 고위 공직자들의 도·감청 공포증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공직 비리 척결’이라는 명제가 동시에 떠올랐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갑(甲) 중 갑’으로 통하는 고위 공직자들도 말 못할 애환을 안고 사는 셈이다.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이름은 참 근사하다. 알고 보니 음습한 조직이었다. 가히 ‘공직윤리 상실’의 종말을 보는 것 같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뿌리는 이른바 ‘청와대 사직동팀’이다. 김대중(DJ) 정부 시절 옷 로비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사직동팀은 1990년대 후반 서슬 퍼런 권력을 자랑했다. 정권교체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당시 취재원으로 만난 경찰 출신의 사직동팀 B씨는 “내가 뜨면 장·차관이든 공기업 사장이든 벌벌 떤다”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직보할 수 있는 정보를 주무르다 보니 이들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직동팀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명맥을 이어나갔다.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이란 이름이었다.

이명박(MB) 정부는 정권교체의 희열이 컸을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그토록 외치다 청와대에 입성했으니 단숨에 세상을 휘어잡을 히든카드를 쥐고 싶었을 것이다. 정적(政敵)을 무너뜨릴 정보, 고분고분하지 않은 공직자들을 쫓아낼 정보가 필요한 만큼 ‘정보 사냥꾼’에겐 새 세상이 열린 셈이다. ‘브레이크 없는 권력’의 그림자는 대통령 취임 초부터 곳곳에서 감지됐다.

어느 금융권 인사는 야당 인사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다가 금융거래내역을 추적당했다고 한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 책임자로 있던 호남 출신 인사는 조기 퇴임 압력을 거부한 뒤 금융거래는 물론 신용카드 사용내역, 식당·골프장 출입기록까지 추궁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한 40대 후반 인사는 자신이 운영하던 업체가 세무조사를 당하고 일감이 끊겨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다고 토로했다. 지식인 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4대 강 반대운동에 참여한 탓인지 각종 연구 프로젝트에서 배제된 채 출판 수입에 대해 세금을 추징당한 학자도 있다. 호남 출신 공직자 중 어떤 이는 감옥으로, 어떤 이는 자살로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민주통합당이 호남에서 ‘밉다 밉다’ 욕을 먹으면서도 반사이익을 누리는 원인일지 모른다.

도·감청이나 불법사찰, 손봐주기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돌고 도는 법이다. 오늘의 집권세력이 내일은 ‘피해자’가 된다. 87년부터 치러진 다섯 번의 대선을 통해 한국사회가 얻은 교훈이다.

4·11 총선을 열흘 앞둔 여야 정당에 바라는 약속이 있다. 바로 ‘고위 공직자 비리수사처(공비처)’의 출범이다. 공직 비리와 권력 남용에 대해 추상 같은 처벌을 내리되, 경찰·검찰·국정원 같은 사정기관들을 상호 견제하는 장치를 갖출 때가 됐기 때문이다.

홍콩의 염정공서(廉政公署·ICAC) 같은 모델을 잘 살리면 비선(秘線) 논란 없이 얼마든지 공직 사회를 감시할 수 있다. 대통령 직속이든, 국회 관할이든 독립성을 부여한다는 전제 아래서다. 사직동팀이니 공직윤리지원관실이니 엉뚱한 간판 달고 ‘권력의 일탈행위’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백번 더 낫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MB 정부 인사들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사후 검증을 해보자는 여론도 높아지는 것 같다. 세상은 돌고 도는데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서 끊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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